신약 세부항목
열매 맺는 삶(빌 1:22)/로빈 - 빌립보서 강해설교
제목 : 열매 맺는 삶
본문 : 빌립보서 1장 22절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1장 22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내가 육체 안에서 산다면 이것은 내 수고의 열매이니라. 그럼에도 내가 무엇을 택할지 알지 못하노니
오늘 이 시간 함께 나눌 하나님의 말씀의 제목은 “열매 맺는 삶”입니다. “열매 맺는 삶” 잠시 기도하고 시작하겠습니다.
** 서론
오늘 말씀의 제목은 “열매 맺는 삶”입니다. 성경은 사람의 인생을 나무로 비유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많은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사람의 삶 속에서도 그 열매라고 할 수 있는, 결과들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나무마다 열매의 종류가 다르고, 또 같은 사과나무라도 그 맛이 다른 것처럼, 우리들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열매는 많은 부분에서 서로 다릅니다.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에 따라서, 열매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이 육체 안에서 사는 삶에 대해서,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해서, 그것이 자신의 수고의 열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주님의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열매를 얻기 원하였습니다.
우리 잠시 마태복음 7장 16-2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6 너희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니 사람들이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거두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좋은 열매를 맺되 변질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변질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지나니
20 그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너희가 그들을 알리라.
예수님께서는 친히 나무와 열매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인간적인 힘으로 율법을 지키고 선하게 살아보려고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즉 그들은 나쁜 나무에서 좋은 열매를 맺어보려고 노력하였다는 것이고, 좋은 열매를 맺음으로써 좋은 나무가 되도록 노력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성령의 열매, 의의 열매를 맺고자 한다면, 사람의 지혜와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직 주님의 생명으로만이, 주님께 붙은 가지만이 의의 열매를 맺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순서는 사람이 선한 열매를 맺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먼저 구원을 받은 사람이어야 선한 열매를 맺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그분의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를 먼저 구원하셨고, 이제 우리가 주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빌립보서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이 맺고자 하였던 수고의 열매가 무엇이었는가를 함께 살펴보면서, 우리가 걸어가는 믿음의 길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이 시간을 붙드시고 친히 은혜로 이끌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 사는 것
이제 우리 다시 빌립보서 말씀으로 돌아오셔서, 빌립보서 1장 21-2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21 이는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시요 죽는 것이 이득이기 때문이라.
22 그러나 내가 육체 안에서 산다면 이것은 내 수고의 열매이니라. 그럼에도 내가 무엇을 택할지 알지 못하노니
23 이는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바라며 내가 둘 사이에 끼어 있기 때문이라. 떠나는 것이 훨씬 더 좋으나
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 안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해 더 필요하니라.
오늘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바라보고 있는 자기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한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21절 말씀에서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시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 바울 안에 사시며, 자신의 선한 기쁨에 따라 바울 안에서 일하사 원하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는 분이시라는 의미입니다(빌 2:13).
사도 바울의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차라리 빨리 죽음을 맞이하고 이 땅을 떠나서, 하늘에서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더 이득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이 훨씬 더 좋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십여 년 전에 셋째 하늘로 끌려 올라갔던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수많은 영광스러운 것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루라도 빨리 저 하늘에 가서 주님과 함께 거하기를 원하였을 것입니다.
우리 잠시 사도행전 14장 19절과 2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9 ¶ 어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움에서 거기로 와서 사람들을 설득하고 바울을 돌로 친 뒤 그가 죽은 줄로 생각하고는 도시 밖으로 그를 끌어내었으나
20 제자들이 그를 둘러섰을 때에 그가 일어나서 도시로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떠나니라.
사도 바울이 언제 셋째 하늘을 보았을까에 대해서, 우리가 만약 성경 기록 속에서 그 장면을 찾아본다면, 바로 이때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때에 사도 바울이 루스드라 지역에서 돌에 맞고 죽은 것처럼 되었던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디옥과 이고니움에서부터 계속 사도 바울을 따라왔던 유대인들은 루스드라 지역 사람들을 설득하고 선동해서 사도 바울을 돌로 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곳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돌에 맞아 죽은 줄로 생각하고는 그를 도시 밖으로 끌어내어 던져버렸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맥박을 짚어보았는지, 아니면 숨을 쉬는지를 확인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들은 사도 바울이 죽은 것이라 판단했고, 그의 몸을 도시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20절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다시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이 바울의 상태를 살피려고 둘러섰을 때, 사도 바울이 눈을 뜨고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눈을 뜬 사도 바울의 행동이 참 이상합니다. 그가 아무리 용감한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방금 전에 자기를 돌로 쳤던 사람들이 가득한 그 도시에 다시 들어간다는 것은 너무나 이상한 행동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한 평생을 트라우마 속에서 살아갈 수도 있는 충격적인 일을 겪은 것인데, 그는 일어나자마자 다시 그 도시로 들어갔습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이 시점에서 셋째 하늘에 다녀온 것이라면, 그가 이 도시로 다시 들어간 이유가 너무나 잘 이해되는데, 그것은 그가 이번에는 진짜로 셋째 하늘에 가고자 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죽는 것을 이득이라고 여겼고, 어서 빨리 이 땅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영광 중에 있는 것을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여전히 이 땅에 남아 있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복음 전파의 사명과 성도들을 세우는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 안에 거하는 것이 성도들을 위해 더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 무엇을 위하여
이제 우리 다시 빌립보서 말씀으로 돌아오셔서, 빌립보서 1장 25절과 2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25 이런 확신이 있으므로 너희가 누릴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 내가 너희 모두와 함께 거하며 머무를 것을 아노니
26 이것은 내가 다시 너희에게 감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의 기쁨이 나로 인해 더욱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아멘.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이 땅에 남아 있는 그 이유와 목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5절 말씀은 사도 바울에게 이런 확신이 있다는 말씀으로 시작되고 있는데, 이런 확신이란 사도 바울이 이 땅에 남아 있는 것이 성도들에게 더 필요하다는 확신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에게 이런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 땅에서의 하루하루를 힘차고 목적 있게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확신이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우리를 지금이라도 즉시 하늘로 부르실 수 있고, 데려가실 수도 있지만, 아직까지 우리를 이 땅에 남겨두셨습니다.
그 이유와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아직 이 땅에 남아 있는 것이, 구원받아야 할 어떤 사람들에게 더 필요하기 때문이고, 또한 성도들의 믿음의 전진을 위해서 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러한 확신 가운데 하루하루를 힘차게 살아갈 수 있기 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확신이 있으므로, 빌립보 성도들이 누릴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 자신이 그들과 함께 거하며 머무를 것은 안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를 위해서, 그리고 기쁨을 위해서 이 땅에 남아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26절 말씀처럼, 언젠가 자신이 다시 빌립보 성도들에게 가게 됨으로써, 주님 안에서 성도들의 기쁨이 바울로 인해서 더욱 풍성하게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이 땅에 남아 있는 이유와 목적은 자신의 기쁨이나, 영광이나, 자랑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기쁨과 영광은 오직 하늘에 있었고, 주님과 만날 그 소망에 있었습니다.
다만 사도 바울은 이 땅에서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 하루하루 전진하고, 수고하며, 열매를 맺기 원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걸어가는 믿음의 삶 또한 이와 같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광야와 같이 메마른 이 땅에서 많은 고난과 역경을 해치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남아 있는 이유는 이 땅에서 무엇인가를 더 쌓아 올리고, 더 모으고, 애착들을 남겨두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이 땅에서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리고 믿음의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을 통한 수고의 열매들을 맺고자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러한 하늘의 소망과 확신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하는 수고와 섬김과 열매 맺는 삶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 확신과 열매
오늘의 빌립보서 말씀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확신과 열매에 대하여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단어들을 이미 앞에서도 보았습니다. 우리 잠시 빌립보서 1장 6절 말씀을 먼저 보시겠습니다.
너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이루시리라는 것, 바로 이것을 나는 확신하노라.
아멘.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이 이 땅에 남아 있는 것이 성도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도들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한 일을 시작하셨고, 또한 계속해서 이루고 계시다는 사실 또한 확신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자신 안에서 일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성도들 안에서도 일하고 계심을 동일하게 확신하였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함께 11절 말씀도 보시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의 열매들로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양이 되기를 구하노라.
아멘.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살면서, 많은 수고의 열매를 맺을 뿐만 아니라, 빌립보 성도들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의 열매들로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양이 되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졌던 확신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하신다는 확신이었고, 또한 사도 바울이 바라고 사모했던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의 열매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통해 바울이 원했던 것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이 돌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삶을 위해서, 우리가 지난번에 살펴보았던 19절 말씀처럼, 빌립보 성도들의 기도를 필요로 하였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께서 공급해 주심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주님의 생명의 공급이 없이는 열매를 맺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 많은 열매
사도 바울은 11절 말씀과 같이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의 열매들이 가득하기를 원하였습니다. 또한 자기 자신이 이 땅에 머물면서 주님으로 인해 많은 열매들을 맺기를 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포도나무의 비유를 말씀해 주시면서 많은 열매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는 것에 의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8).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많은 열매를 맺을 수가 있을까요? 먼저 우리가 많은 열매에 대해 생각할 때 주의할 점은 단지 눈에 보이는 성공적인 일들만을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대언자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정말 멸망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심판과 멸망을 선포하였습니다. 요나의 마음은 하나님과 같이 니느웨 사람들을 아끼고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요나가 단 하루 말씀을 전한 결과 왕으로부터 온 백성이 회개하고 돌이키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욘 3:4,5).
그렇다면 스데반의 복음 선포는 어떠했을까요? 성경은 스데반이 성령님으로 충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행 7:55). 그러나 그가 말씀을 선포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귀를 막고 달려들어 그를 돌로 쳤습니다.
우리가 겉모양만 본다면, 요나는 많은 열매를 맺었고, 스데반은 열매를 맺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으로 충만해서 주님과 함께 일했던 사람은 요나가 아니라 오히려 스데반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과 결과들과 열매들에 대해서는, 오직 주님께서 계산하시고 칭찬하실 것임으로, 우리는 단지 눈에 보이는 결과만을 구하거나, 겉모양으로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짐 엘리엇 선교사는 29세의 젊은 나이에, 에콰도르의 아우카 부족이라는 식인종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지도 못하고 단지 “나는 당신의 친구입니다.”라는 말만을 남긴 채 창에 맞아 죽었습니다.
모세는 200만 명에 가까운 백성들을 이끌었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이라는 두 명 외에 다음 세대들을 얻지 못했고, 언제나 백성들의 도전과 반역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대언자 엘리야는 많은 기적들을 일으켰지만, 끝내 아합왕의 마음을 바꾸지 못했고, 이스라엘 민족을 회개시키지 못했으며, 다만 엘리사라는 후임자 한 명만을 남겨놓았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12제자들을 부르셨으나, 그중 하나는 배반했고, 나머지도 결정적인 순간에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겉모습만을 보면서, 무엇인가를 판단하거나, 혹은 우리 자신을 스스로 평가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매우 잘못된 관점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때로 우리에게는 나에게 아무런 열매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낙담이 되는 순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서 보시고 기뻐하시며 영광을 받으시는 열매는, 눈에 보이는 성공적인 결과물들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생명과 성품이 온전히 나타난 한 걸음, 한 걸음의 순간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께 붙어 있는 나무, 주님께 붙어 있는 가지가 되기를 원하시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말과 행동의 모든 순간에 주님의 생명과 사랑과 은혜와 긍휼이 흘러나오기를 원하십니다.
** 정리
오늘 우리는 “열매 맺는 삶”이라는 제목으로 빌립보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서 이 땅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있기를 원했지만, 그는 여전히 확신을 가지고 이 땅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 확신은 주님께서 자신을 이 땅의 성도들을 위해 남겨두셨다는 확신이었고, 성도들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주님께서 친히 일하시고, 또 자신과 함께 일하신다는 확신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을 통하여, 수고와 섬김의 열매들을 가득히 얻기 원하였는데, 그것은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님께만 찬양과 영광이 돌려지는, 주님께서 친히 일하시고, 나타나시는 순간들이었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말씀을 정리하면서, 마태복음 13장 2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좋은 땅속에 씨를 받은 자는 말씀을 듣고 그것을 깨닫는 자니 그것은 또한 열매를 맺어 얼마는 백 배, 얼마는 육십 배, 얼마는 삼십 배를 내느니라, 하시니라.
아멘. 예수님께서는 친히 열매를 많이 맺는 방법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좋은 땅속에, 즉 준비된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는다면, 그 말씀이 또한 열매를 맺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곧 주님의 말씀으로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말씀으로 가득하다는 것은 곧 주 예수님으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긴장하고 노력해서 많이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만 말씀으로 충만해지고, 주님으로 가득해지면, 그 말씀이 친히 일하고 역사하여 열매 맺는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 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의 마음이 오직 주님의 말씀을 향해 활짝 열려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아직 이 땅에 남아 있는 그 이유와 목적과 사명을 우리가 잘 깨닫고 확신하며, 주님으로부터 힘을 공급받아서, 주님께서 사시는 생명의 삶, 열매 맺는 삶으로 날마다 매순간 힘차게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
<소망> 주제 추천글
- 우리가 구할 것(눅 12:29-34)/로빈
-
빌립보서 공부자료
- 1
- 2
- 3
- 4
- 5
- 6
-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