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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존귀하게(빌 1:19-21)/로빈 - 빌립보서 강해설교

2022.08.03.수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 이승선(40세)

제목 :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본문 : 빌립보서 1장 19-21절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1장 19-21절 말씀입니다.
19 이는 너희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께서 공급해 주심을 통해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에 따라 이것이 나의 구원으로 바뀔 줄 내가 알기 때문이라.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내가 어떤 일로도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고 항상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 안에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것이니
21 이는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시요 죽는 것이 이득이기 때문이라.

오늘 이 시간 함께 나눌 하나님의 말씀의 제목은 “그리스도를 존귀하게”입니다.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잠시 기도하고 시작하겠습니다.


** 서론
오늘 말씀의 제목은 “그리스도를 존귀하게”입니다. “존귀”하다는 말을 한자로 찾아보면 “높을 존”(尊)자에 “귀할 귀”(貴)자를 써서, “높고 귀하다”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자신의 몸 안에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소망하였는데, 이것은 주님만을 높이고 귀하게 여기기를 원하였다는 것입니다.

“존귀”하다는 말을 영어로도 보시면, 20절 말씀 4번째 줄 부분에 “magnified”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또한 “확대하다”, “크게 하다”, “찬양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찌하든지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였는데, 이것은 곧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귀하게 여기며, 크게 드러내고 찬양하기를 원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길, 사람의 길, 육신의 길과 정반대가 되는 것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육신의 길은 곧 자기 자신을 존귀하게 하는 길입니다. 육신의 길은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을 조금 더 존중받고 인정받게 하는 길이며, 자신을 조금 더 크게 하고 높이며 귀하게 여기는 길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걸었던 길은 자기를 부인하는 길이었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존귀하게 하는 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살든지 죽든지 그러한 길로 가고자 했던 것은 주님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이고, 장차 주님께서 주실 영원히 존귀한 보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함께 주님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걸어가는 믿음의 길을 새롭게 하기 원합니다. 참으로 우리의 몸 안에서도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시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이 시간을 붙잡아 주시고 친히 말씀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 바울이 원한 승리
이제 우리 함께 빌립보서 1장 18절과 19절 말씀부터 보시겠습니다.
18 그러면 무엇이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치레로 하든지 진실로 하든지 모든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 선포되시나니 이로써 나는 그것을 기뻐하고 참으로 기뻐하리라.
19 이는 너희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께서 공급해 주심을 통해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에 따라 이것이 나의 구원으로 바뀔 줄 내가 알기 때문이라.

아멘. 오늘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어찌하든지 그리스도께서 선포되시는 일로 인하여 기뻐하고 기뻐하였던 그 이유와 비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으로 인하여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그 일은 놀랍게도 복음을 진전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사도 바울을 시기하게 하고 질투하게 하려고 순전하지 않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하였고, 또 다른 이들은 바울을 격려하고 응원하기 위해서 사랑으로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모든 소식을 들을 때,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리스도께서 선포되시기 때문에 기뻐하고 참으로 기뻐하였습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인 19절 말씀에서는, 사도 바울이 그렇게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를 조금 더 자세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 바울을 위한 빌립보 성도들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께서 공급해 주심을 통해서,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에 따라 그 기쁨이 바울의 구원으로 바뀔 줄을 그가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구원”이라는 단어를 특별히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주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죄들의 용서를 받으며, 영원한 생명을 얻어서, 지옥의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고 표현할 때 사용하는, 그 구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서,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였습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사용한 구원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오직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 생명의 삶, 승리의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되신다는 그 소식을 기뻐하는 것이 곧 바울의 구원이요, 승리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잠시 빌립보서 2장 12절과 1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2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순종한 것같이 내가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순종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일하여 드러내라.
13 자신의 선한 기쁨에 따라 너희 안에서 일하사 원하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지금 우리가 함께 읽은 두 구절의 말씀에서 우리는 구원이라는 단어와 기쁨이라는 단어가 함께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권면하기를 주님께 더욱더 순종하여 두려움과 떨림으로 자신의 구원을 일하여 드러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순종하여 지옥의 심판으로 구원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도들이 복음과 은혜를 통해 받은 완전한 구원을 가지고, 더욱더 주님께 순종하는 생명의 삶, 승리의 삶으로 나아가라는 의미입니다.

그러한 삶은 바로 13절 말씀에 기록된 것처럼, 구원받은 성도들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 곧 자신의 선한 기쁨에 따라 성도들 안에서 일하셔서, 원하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는 분을 따라 순종하며 나아가는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승리의 삶, 생명의 삶을 가리켜서 “구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로마서 말씀에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기 때문이라.”라고 하면서, “해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하였고, 또한 갈라디아서에서는 “자유”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롬 8:2, 갈 5:13).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구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이러한 생명의 삶, 승리의 삶이 사람의 노력과 힘으로 이룰 수가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빌립보서 1장 19절 말씀을 보시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기도를 통해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께서 공급해 주심을 통해서, 이것이 나의 구원으로 바뀔 줄을 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승리의 삶을 위해 바울에게 주님께서 건져주시는 구원이 필요하였고, 성도들의 기도가 필요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영께서 공급해 주시는 권능이 필요하였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도 자신이 감옥에 갇힌 상황에 대해서 마냥 평안하고 기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마음 한구석에서는 답답하고 괴로운 심정도 있었을 것입니다. 시기와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조금은 불편하고 괴로운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기도를 필요로 하였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께서, 즉 성령님께서 위로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며, 힘을 공급해 주시는 것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주님의 건지심을 힘입어서, 오직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생명의 삶, 승리의 삶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성도들의 기도가 필요하였다면,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를 위해서 뜨겁게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또한 사도 바울에게 성령님의 공급해 주심이 필요하였다면, 우리 모두에게도 성령 충만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언제나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처럼, 주님께 붙어있어서, 주님께로부터 오는 위로와 힘과 은혜와 권능과 생명을 공급받아서, 그 힘으로 주님을 따르는 삶으로 힘차게 나아가게 되기를 원합니다.


**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
이제 우리 함께 빌립보서 1장 20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시겠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내가 어떤 일로도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고 항상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 안에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것이니
아멘. 사도 바울은 자신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무엇인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어떤 일로 인해서도 주님 앞에서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고, 부끄럽지 아니하며, 항상 그러하였던 것처럼,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온전히 담대하여서, 살든지 죽든지 자신의 몸 안에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먼저 어떤 일로도 수치를 당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힌 죄수의 신분이었지만, 이처럼 그가 감옥에 갇혔다는 것이 그에게 수치스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을 수치스러워하였다면, 그가 결박된 것이 로마의 궁궐 안과 다른 모든 곳에 드러나게 되었기 때문에, 그는 세상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정말 수치스러운 일은 어느 순간 주님 안에서 온전히 담대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만약 주님을 부끄러워하거나 담대하지 못하여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서 주저하고 물러섰다면, 바로 그것이 그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성도들에게 정말 부끄러운 일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라, 세상의 기준에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앞에서, 주님의 말씀 앞에서의 부끄러움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떤 사람들이 길을 가다가 정말 아프게 넘어졌는데,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게 된 그 상황이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얼른 일어나서 재빨리 지나가는 모습들을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육체적인 아픔보다 수치스러운 상황 속에 있는 것이 더 큰 고통이기 때문에, 그 상황을 빨리 지나가 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부끄럽고 민망하고 수치스러운 순간들을 피하려고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정말 피하고자 하였던 수치스러운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라 주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자신이 담대하지 못하여 주님을 인정하지 못하고, 고백하지 못하고, 증거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마치 베드로가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고 나서 그것에 대해 비통하게 울었던 것처럼, 우리 성도들에게 참으로 비통하고 수치스러운 일이 있다면, 그것은 주님을 담대하게 증거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어떤 일로도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고, 항상 그러했던 것처럼, 지금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자신의 몸 안에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말 그대로 정말 간절한 것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이것을 살아 있을 때뿐만 아니라, 심지어 죽게 될지라도 참으로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에, 항상 그러했던 것처럼, 이 편지를 기록하고 있던 바로 그 시점인 지금도 온전히 담대하기를 원했습니다. 또한 그가 살든지 죽든지, 심지어 죽음 앞에 서 있을 때에도, 그렇게 온전히 담대하여 오직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다른 여러 가지 수치와 부끄러움을 다 당하게 된다 할지라도, 주님 앞에서는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잘했다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자랑스러운 자녀로 설 수 있기를 원합니다.


** 사는 것이 그리스도시요
이제 우리 함께 빌립보서 1장 21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시겠습니다.
이는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시요 죽는 것이 이득이기 때문이라.
아멘.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의 삶의 정체성, 인생의 방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백하기를 “이는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시요 죽는 것이 이득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며, 오직 그분으로 인한 것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사도 바울의 모든 원함과 지혜와 능력이 오직 주님의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시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구원받은 성도들 안에 살아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생명으로 살아계시며, 자신의 선한 기쁨에 따라 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우리도 원하게 하시고, 또한 행하게 하시며, 담대하게 하시고, 권능이 있게 하십니다.

우리가 주 예수님의 생명을 힘입어 산다면, 주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사신다면, 우리는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과 같이 오직 “그리스도를 존귀하게”하는 삶으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그러한 생명의 삶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죽는 것이 이득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참으로 놀라운 고백을 하였는데, 그는 단지 죽어도 괜찮다고 말하며,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는 것이 이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죽음을 이득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을까요?

우리 함께 빌립보서 1장 23절과 2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23 이는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바라며 내가 둘 사이에 끼어 있기 때문이라. 떠나는 것이 훨씬 더 좋으나
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 안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해 더 필요하니라.

사도 바울은 두 가지 필요와 원함 사이에 끼어 있었습니다. 한 가지는 바로 이 땅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었고, 또 한 가지는 이 땅에 남아서 성도들과 함께 거하며, 그들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사도 바울이 더 원하고, 훨씬 더 좋다고 여긴 것은 바로 이 땅의 모든 수고와 고생을 뒤로하고, 하늘로 떠나서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사도 바울은 죽는 것이 이득이라고 말했던 것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러한 마음은 모든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있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맛있는 음식도 먹고, 재미있는 것들도 보고, 또 즐거운 일들도 하면서 소소하게 기쁨을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더 많은 수고와 고통과 괴로움이 있습니다.

우리 학생들은 계절마다 시험을 봐야 하고, 시험을 볼 때마다 많은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더 이상 시험이 없는 어른이 되면 자유롭고 행복할 것만 같지만, 어른들도 많은 해야할 일들 속에서 바쁘고 지치게 살아갑니다. 이 땅에서는 경제적으로, 건강으로, 가족들의 상황으로 여러 가지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참 많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바라보고 사모하는 하늘의 소망은 어떤 것입니까? 그곳에서는 더 이상 고통이나 괴로움이 없고, 슬픔이나 눈물도 없습니다. 그 어떤 고생이나 상처도 없고, 오직 주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화평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당장 그 좋은 곳으로 데려가지 아니하시고, 여전히 이 땅에 남아서 살아가게 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이 땅에 남아 있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이 땅에 진리를 듣고 주님을 알아야 할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기 위하여 이 땅에 남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대단한 사람이라서 혼자서만 그러한 사명과 이유로 이 땅에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 모든 구원받은 성도들이 그 동일한 이유로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우리가 주님의 생명을 힘입어서 오직 “그리스도를 존귀하게”하는 삶으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 정리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를 존귀하게”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힌 사람으로서, 절망 가운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낙담하고만 있을 수도 있었지만, 감옥 안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최선의 섬김을 하였습니다.

그는 로마의 감옥에서 카이사르의 집안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많은 교회들에게, 또 형제들에게 편지를 썼으며,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그를 골로새 교회에 있는 빌레몬 형제에게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이 포기하거나 물러서지 않고 넘치게 주님을 섬겼던 이유는 바로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그의 몸 안에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위해서, 성도들의 기도가 필요하다고 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께서 공급해 주시는 일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승리의 삶을 구원이라고 표현하면서, 주님께서 건져주셔야 가능한 일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오늘 나아가는 길은 오직 주님의 권능을 힘입고, 그분의 건지심을 힘입어서, 나아가는 승리의 길입니다. 성도들의 서로를 위한 기도로 인해서, 우리 안에서 강력한 활동으로 일하셔서, 원하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는 주님의 공급하심과 건지심을 힘입어서 우리는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서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결론은 죽는 것이 두렵거나 아쉬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이득이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죽음이라는 문을 지나서 주님과 함께 안식하고 기뻐할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 땅에 남아 있었던 것은 이 땅에 남아 있는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감옥이라는 제한된 상황 속에서도 넘치게 주님을 섬기고자 하였고, 주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도록, 수치스럽지 않도록 담대하게 주님을 섬기고자 하였습니다.

우리 또한 언젠가 주님 앞에 서게 될 주님의 자녀들로서, 이러한 간절한 기대와 소망 가운데 걸어가기를 원합니다. 주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서, 잘했다고 칭찬을 받는 영광스러운 자녀로서 설 수 있도록, 날마다 매순간 주님과 동행하기를 원합니다.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시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힘입어서, 우리도 그렇게 힘차게 걸어가기를 원합니다. 참으로 날마다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드러내고 높이고 경배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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