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세부항목
같은 일 다른 의도(빌 1:15-17)/로빈 - 빌립보서 강해설교
제목 : 같은 일 다른 의도
본문 : 빌립보서 1장 15-17절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1장 15-17절 말씀입니다.
15 참으로 어떤 이들은 심지어 시기와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또한 어떤 이들은 선한 뜻으로 하나니
16 한 부류는 내가 결박된 것에 고통을 더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하지 않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하나
17 다른 부류는 내가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세워진 줄 알고 사랑으로 하느니라.
오늘 이 시간 함께 나눌 하나님의 말씀의 제목은 “같은 일 다른 의도”입니다. “같은 일 다른 의도” 잠시 기도하고 시작하겠습니다.
** 서론
오늘 말씀의 제목은 “같은 일 다른 의도”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많은 일들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일들을 하는 다양한 이유와 목적과 동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어떤 일이 너무 재밌고 즐거워서 하기도 하고, 때로는 가만히 두기가 너무나 괘씸하고 못마땅해서 하기도 하며, 때로는 다른 선택지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억지로 하기도 합니다.
오늘의 말씀에서도 우리는 같은 일을 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이 했던 일은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참으로 놀랍고 영광스러운 일이었지만, 그 일을 하는 그들의 의도와 동기와 목적이 서로 달랐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걸어가는 믿음의 길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가 결정하고 선택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일에서, 우리의 의도와 목적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이 시간을 붙드시고, 친히 은혜로 이끌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 카이사르의 집안
이제 우리 함께 빌립보서 1장 12-14절 말씀부터 보시겠습니다.
12 그러나 형제들아, 내게 일어난 일들이 도리어 복음을 진전시키는 계기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원하노라.
13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결박된 것이 온 궁궐 안과 다른 모든 곳에서 드러나게 되었고
14 주 안에 있는 형제들 중의 많은 이들이 내가 결박된 것으로 말미암아 확신을 갖게 되어 두려움 없이 더욱더 담대하게 말씀을 말하게 되었느니라.
오늘의 말씀은 당시 사도 바울의 상황과 주변의 여러 가지 변화들에 대한 소식들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히고 결박된 일은 분명히 복음 전파에 막힘이 되고 걸림돌이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히지 않았더라면, 그는 자유롭게, 열정적으로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은 사람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감옥에 갇히게 하심으로써, 그의 결박된 상황을 통하여 도리어 더 많은 곳에서 복음이 전파되고 진전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먼저 사도 바울이 복음으로 인해 결박되었다는 소식이 13절 말씀과 같이, 로마의 궁궐 안팎으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믿음 안에서 사도 바울이 대단한 인물이었던 것은 맞지만, 과연 로마의 궁궐 안에서는 사도 바울이 어떻게 알려지게 되었던 것일까요? 바울이 결박되었다는 것이 로마의 궁궐 안에 알려졌다는 것은 과연 어떤 상황이었을까요?
먼저 우리 잠시 빌립보서 4장 2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카이사르의 집안에 속한 자들이 문안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이 말씀과 같이 빌립보서를 마무리하면서, 카이사르의 집안에 속한, 구원받은 성도들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아마도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힌 이후로, 새롭게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게 된 새로운 형제자매들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 함께 사도행전 18장 2절 말씀도 보시겠습니다.
본도에서 태어난 아굴라라 하는 어떤 유대인을 만났는데 (클라우디우스가 모든 유대인들에게 명령하여 로마를 떠나게 하였으므로) 그가 자기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최근에 이탈리아에서 왔더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서
이 말씀에서 우리는 여러 새로운 이름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먼저 사도 바울과 아굴라라는 유대인의 만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대인이었던 아굴라는 자기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최근 이탈리아 로마에서 왔고, 1절 말씀에 기록된 것처럼, 고린도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 보고자 하는 것은 괄호 안에 있는 내용인데, 바로 클라우디우스가 모든 유대인들에게 명령하여 로마를 떠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등장한 클라우디우스는 당시 약 13년이라는 기간 동안 통치하였던 로마 황제의 이름입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모든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시킨 이 칙령은 “나사렛 칙령”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고, 이때 만들어진 비문이 현재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부활의 복음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면서, 이 사실을 거부하는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찾기 위해서 온갖 무덤들을 파헤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몸을 가져다가 다른 곳에 숨겼다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아마도 손과 발에 못 자국이 있고, 옆구리에 창에 찔린 동일한 상처를 가진 시체만 나오면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부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이 일이 매우 크게 번져나가는 것을 보았고, 사회적인 혼란을 막기 위해서 “나사렛 칙령”을 발령하였습니다. 그 핵심 내용은 죽은 자들의 무덤을 파헤치지 말라는 것이었고, 누구든지 남의 무덤을 훼손하거나 약탈하면 최고의 형벌을 내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클라우디우스는 이러한 내용이 적힌 비문을 예루살렘과 베들레헴과 나사렛에 설치하였는데, 이후에 나사렛에 설치되었던 비문이 잘 보존된 상태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나사렛 칙령”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이러한 나사렛 칙령을 발포하면서, 모든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내쫓았습니다. 로마 도시에서 결코 그 어떠한 혼란도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히 막겠다는 의지였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볼 때,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의 종교적인 이슈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은 로마 궁궐과 카이사르의 집안 내에서도 상당히 유명한 주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당시에 사도 바울이 결박된 자가 되어, 스스로 카이사르에게 청원하고, 로마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독살되어 죽고 나서, 피의 네로라는 별명을 가진, 네로 황제가 통치하고 있었던 때입니다. 카이사르의 집안은 치열한 권력 다툼과 음모가 도사리는 무서운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왕족과 귀족이면서도, 언제나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카이사르의 집안에 속한 자들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사도 바울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또 그가 전하는 부활의 복음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였을 것입니다. 한때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입장에 서서, 적극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핍박하다가, 어느새 인생의 반전을 맞이하고, 갑자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던, 사도 바울이 스스로 카이사르에게 청원을 하고 로마 감옥에까지 찾아오게 되었으니, 카이사르의 집안에 속한 자들은 많은 호기심과 관심을 가지고, 그에게 접근하고, 대화를 시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결박되어 로마 감옥에 왔다는 소식이 궁궐 안에서와 밖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빌립보서 말씀의 마지막 인사에서 보았던 것처럼, 카이사르의 집안에 속한 많은 자들이 복음을 믿고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고, 참으로 그가 감옥에 갇힘으로 복음이 진전되었습니다.
** 많은 형제들의 진전
이제 다시 빌립보서 1장 말씀으로 돌아오셔서, 다시 14절 말씀을 보시면, 주 안에 있는 많은 형제들에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결박된 것으로 인해서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확신을 갖게 되어 두려움 없이 더욱더 담대하게 말씀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힌 상황은 많은 형제들에게 확신과 담대함을 주었습니다. 바울이 결박된 일은 그가 가진 믿음과 소망과 확신에 대한 증거였습니다. 바울이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전진하고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이와 같은 한 사람의 용기와 참된 믿음의 전진은, 많은 고난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형제들에게 확신을 주고 용기를 주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작은 소년에 불과했던 다윗 한 사람이 일어나서 골리앗을 쓰러뜨렸을 때, 칼과 창도 제대로 가지지 못했던 이스라엘 군대가 승리를 확신하며 일어났고, 최강의 무기로 무장하고 있던 블레셋 군대가 도망하였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한 명의 작은 소년이 드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부터,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열두 바구니나 남기는 기적이 일어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 속에서, 그리고 역사 속에서, 주님의 놀라운 일들이 이처럼, 작은 한 사람을 통해서 일어난 경우들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결박과 갇힘을 통해서 많은 형제들에게 확신과 담대함을 주셨고, 복음의 진전이 있게 하셨습니다. 참으로 오늘 우리 각 사람이 너무나 작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이러한 주님의 역사들을 일으키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로 주님께 사용 받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두 부류의 사람들
이제 우리가 처음에 읽었던 빌립보서 1장 15-17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시겠습니다.
15 참으로 어떤 이들은 심지어 시기와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또한 어떤 이들은 선한 뜻으로 하나니
16 한 부류는 내가 결박된 것에 고통을 더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하지 않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하나
17 다른 부류는 내가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세워진 줄 알고 사랑으로 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결박된 이후에 복음이 진전된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결박이라는 사건을 계기로, 더욱더 복음을 전하게 되었는데, 그러한 동일한 일이 서로 다른 의도로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5절 말씀에서는 어떤 이들은 시기와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또 다른 어떤 이들은 선한 뜻으로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기와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했던 형제들은 16절 말씀처럼, 바울이 결박된 것에 고통을 더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하지 않게 다툼으로, 경쟁하며 그리스도를 선포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 꼼짝도 못하는 상황을 기회처럼 이용해서, 마치 자신들의 세력을 더 넓게 구축하듯이, 자신들의 영역을 넓혀가듯이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워나갔습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그러한 상황을 괴로워하면서, 패배감을 느끼고 고통스러워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부류의 형제들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서, 감옥에도 갇히고, 그렇게 세워진 줄을 알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18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치레로 하든지 진실로 하든지 모든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 선포되시나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참으로 기뻐하리라.
사도 바울은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형제들이 다른 복음이나, 거짓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그리스도를 선포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선포되시는 것으로 인해서 기뻐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기뻐하고 참으로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복음을 선포하는 동기와 의도가 자신의 사역적인 성공이나,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는 것이나,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동기와 목적은 오직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위대한 사명을 감당하면서도, 그 일을 열정적으로 감당하면서도, 시기와 다툼으로, 육신의 동기로 일했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교묘한 육신은 영적인 일들에도 열심을 낼 수가 있고, 경쟁심을 발휘할 수가 있습니다.
누가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가, 누가 더 성경을 많이 읽는가, 누가 더 많은 성도들의 소식을 알고 있는가 하는 여러 부분에서 육신의 경쟁심과 시기와 다툼이 동기가 될 수 있습니다.
마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사역자들의 이름으로 편 가르기를 하면서, 영적인 것처럼 보이는 경쟁을 하였던 것처럼, 우리의 육신은 영적인 일들에서도 많은 열정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같은 일을 하고, 같은 말을 할지라도 전혀 다른 의도로 그 일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것 – 바른 의도
참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께 영광과 기쁨이 되는 것이며, 오직 주님께 칭찬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이, 우리의 모든 삶이 헛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일은 어떤 일일까요? 우리 함께 고린도전서 4장 5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오실 때까지 때가 되기 전에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분께서 어둠의 감추어진 일들을 빛으로 가져가 드러내시며 마음의 의도들을 드러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이 하나님께 칭찬을 받으리라.
아멘. 성경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때가 되기 전까지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을 잘 따라가기 위해서, 어떠한 길이 옳은 것인가를 전혀 생각하지 말거나, 분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일에 대해서도 최종적인 판단인 것처럼, 평가하거나 칭찬하거나 정죄하며, 결론을 내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일의 숨겨진 의도를 모르기 때문이고, 오직 주님께서 모든 감추어진 일들을 빛으로 가져가 드러내실 때, 마음의 의도들을 드러내실 때, 가장 정확하게 최종 판단을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면 어둠의 감추어진 일들을 빛으로 가져가 드러내시며 마음의 의도들을 드러내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각 사람이 하나님께 칭찬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의 의도와 동기를 분별하는 분이시며, 바른 의도로 바르게 행한 것에 대해 칭찬하시고 보상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육신 안에서 걸으면서, 육신의 길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결코 바른 의도로 주님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육신의 사랑은 너무나 안타깝게도 가장 순수하고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자녀들을 향한 사랑 속에서도, 남편과 아내를 향한 사랑 속에서도, 부모님을 향한 사랑 속에서도, 이기적이거나, 자기 영광과 욕심을 추구하는 부분이나, 여러 가지 계산이 섞여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기 계산이 들어간 육신의 사랑과 섬김 속에서는 결코 온전한 주님의 관점이 있을 수가 없고, 바른 의도의 바른 섬김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어떤 일들이 비슷할 수 있겠지만, 그 시작점인 의도와 그 도착점인 목적이 완전히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순수하게, 온전히 바른 의도와 동기로 주님을 따르고 섬길 수가 있을까요? 그 길은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나, 언제나 긴장하고 정신을 바짝 차리는데 있지 않고, 오직 십자가에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끝났으며,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진리의 말씀만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주님, 주님의 뜻을 원하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며, 내 안에서 강력한 활동으로 일하시는 주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릴 때만이 우리에게 길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결박된 상태에서도, 매우 답답한 상황 속에서도 오직 그리스도께서 선포되시고, 주님의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인해 기뻐하고 참으로 기뻐하였던 것은 그에게 어떤 다른 의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우리도 오직 주님이라는 의도나 목적 외에 다른 것이 없기를 원하고, 오직 주님 한분 만으로 기뻐하고 만족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 정리
오늘 우리는 “같은 일 다른 의도”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혔을 때, 복음을 열정적으로 전파하고 담대히 그리스도를 선포하였던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한 부류는 시기와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하였고, 한 부류는 순전하게 선한 뜻으로 하였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높이는 의도와 동기로 걸어갔던 사도 바울은 그러한 모든 일로 인해서 기뻐하고 참으로 기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넘치게 주님을 따르고 섬기되, 주님을 향한 사랑의 동기와 오직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목적으로, 성령 안에서 걷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러한 순수하고 온전한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와도 다투거나 시기하거나 경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은혜와 긍휼로 말미암아 살아가고 있고,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삶으로 나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라, 하늘에서 주님 앞에서 최종 평가받을 것이고, 칭찬받을 것이며, 상속 유업의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주님을 참되게 따르고 섬기되,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에게 새로운 힘과 기쁨을 넘치게 주시기 원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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