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8. 갈보리침례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질문이 만드는 답(왕하 1:1-4)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하 1장입니다. 열왕기하 1장 1-4절 말씀입니다.
1 그때에 아합이 죽은 뒤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니라.
2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던 자기의 다락방 격자창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들을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내가 이 병에서 나을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라, 하니라.
3 그러나 주의 천사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들을 만나 그들에게 말하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4 그러므로 이제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올라간 그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 것이요,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라, 하매 엘리야가 떠나가니라.
저는 오늘 “질문이 만드는 답”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오늘 말씀의 제목은 ”질문이 만드는 답”입니다. 사람의 인생은 문제와 질문으로 가득하고, 이 세상은 해답을 찾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아이들이 말을 배우고 주변의 여러 가지 사물과 일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질문 공세가 시작됩니다. “이건 뭐에요?”, “그건 무슨 말이에요?” “왜요?, 왜요?” 이러한 질문들이 끊임없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은 아이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끊임없이 삶 속에서 문제들을 만나게 되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왜 그럴까?”,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길까?”, “나는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까?”, “왜 나는 이렇고, 우리 집은 이럴까?”, “만약 이 일이 잘 안되면 어떻게 할까?” 이러한 여러 가지 질문들이 끊임없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질문이 만드는 답”이라는 오늘 말씀의 제목과 같이, 좋은 질문이 좋은 결론을 이끌어 낸다는 말이 있습니다. 만일 우리 자녀들이 진로에 대해 생각할 때,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할까?”라는 질문을 “나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실까?”라는 질문으로 바꾼다면, 그 답을 찾는 과정과 방향과 찾게 되는 답 그 자체가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면서, “저 형제, 저 자매는 왜 저러지?”라는 질문을 “이 귀한 교회로 나를 이끄시고 저 지체와 한 몸이 되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내가 저 형제, 저 자매를 어떻게 섬기기를 원하실까?”라는 질문으로 바꾼다면, 우리의 교회 생활이 달라질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아합 왕의 아들이었던, 아하시야의 질문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의 질문은 바로 “내가 이 병에서 나을 것인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하시야는 바로 그 잘못된 질문의 결과로 말미암아 죽게 되었습니다. “아니 아픈 사람이 나을 것인가 물어보는 것이 무슨 잘못이라고 그것 때문에 죽는다는 말인가?”하는 의문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열왕기하 1장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질문, 화평의 답을 찾을 수 있는 질문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 다락방 격자창에서 떨어진 아하시야
먼저 우리 함께 열왕기하 1장 바로 앞에 있는 열왕기상 22장 51-53절까지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51 유다 왕 여호사밧의 제십칠년에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을 통치하기 시작하여 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하니라.
52 그가 주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자기 아버지의 길과 자기 어머니의 길과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걸었더라.
53 그가 바알을 섬기고 그에게 경배하며 자기 아버지가 행한 모든 것에 따라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켰더라.
아하시야는 아합 왕의 아들로 사마리아에서 2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하였습니다. 그는 주의 눈앞에서 악을 행한 사람이었고, 바알을 섬기고 경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 아합이 바알을 숭배하는 길로 걸으면서, 어떤 일들이 있었고, 어떤 경고의 말씀들이 선포되었고, 어떤 결말이 있었는지 다 보고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바알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켰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처음 읽었던 열왕기하 1장 1,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 그때에 아합이 죽은 뒤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니라.
2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던 자기의 다락방 격자창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들을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내가 이 병에서 나을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라, 하니라.
여기서 우리는 아하시야가 왕이 되고 나서 2년 동안 통치하면서 생겼던 많은 일들 중에서, 좋지 않은 일 2가지를 볼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스라엘을 섬기며 화평하였던 모압이 배반을 하였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아하시야가 다락방 격자창에서 떨어져 부상을 당하고 병이 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 속에 우연이란 없습니다. 재수가 없거나, 운이 나빠서 생기는 일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우리들의 삶 속에는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도 아버지의 허락하심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왕국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진다면, 이스라엘 왕에게 어떤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결코 우연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의 삶 속에서도 우연히, 어쩌다가, 저절로 벌어지는 일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아하시야의 질문은 바로 이렇게 시작되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러한 일들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무엇이며, 무엇을 경고하시며, 무엇을 가르쳐 주시는가?”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면서 화평하던 관계에 금이 가고 불화가 생기는 것처럼, 우리가 사람들과 갈등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물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욱 분명한 십자가의 삶으로 이끄시는 신호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저 사람 왜 이래?”라고 잘못된 질문을 하게 되면, 육신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고, “주여,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라고 올바른 질문을 하게 되면, 성령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압과의 불화를 통하여, 아하시야에게 신호를 주셨지만, 그는 우둔하여 깨닫지 못하였고, 하나님께 나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좀 더 강력하고 분명한 신호를 주셨는데, 그것은 그가 다락방 격자창에서 떨어져 병이 드는 상황을 허용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때에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물었어야 합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가?”
그가 다락방에서 떨어져 즉사하지 아니하고, 아직 살아있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직 그를 완전히 끝내시고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경고를 통해서, 그가 돌이키기를 원하셨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살아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전히 기회를 주고 계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하시야의 질문은 단지 자기가 병에서 나을지에 대한 것이었고, 그것도 살아계신 하나님께 향한 것이 아니라, 헛된 우상이었던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질문은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켰고, 그에 대한 심판을 확정짓는 것이었습니다. 잘못된 질문으로 말미암아 심판이라는 답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가 만약 하나님께 나아와 길을 묻고 돌이켰다면, 그는 반드시 긍휼을 얻어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할 때,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건강의 문제, 재정의 문제, 자녀의 문제, 직장의 문제, 진로의 문제 속에서, 주님께 올바른 질문으로 여쭙고, 화평과 긍휼의 대답을 얻을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 하나님의 대답
이제 우리 함께 열왕기하 1장 3,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3 그러나 주의 천사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들을 만나 그들에게 말하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4 그러므로 이제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올라간 그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 것이요,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라, 하매 엘리야가 떠나가니라.
아하시야는 마땅히 올바른 질문을 가지고 올바른 대상 앞에 나왔어야 합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주 예수님께 “주여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물었던 것처럼, 자신의 모든 길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물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하시야는 단지 자기 병이 나을 것인가에 대하여, 바알세붑에게, 헛된 우상에게 묻고자 하였습니다. 문제의 근원과 원인을 보려고 하지 않고, 그저 나타난 현상만을 해결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만약 회개하며 하나님께 물었더라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병을 낫게 하여 주셨을 것이고, 생명을 연장하여 주셨을 것이며, 새로운 기회를 주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가 다락방에서 떨어졌음에도 아직 살아있었던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아하시야는 엉뚱한 대상에게 어리석은 질문을 함으로 말미암아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대언자 엘리야를 통하여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는 엄중한 심판의 말씀을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 함께 예레미야서 2장 1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으니 곧 그들이 생수의 샘인 나를 버렸고 또 자기들을 위해 물 저장고들 즉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저장고들을 팠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대언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두 가지 악을 책망하셨는데, 첫 번째는 그들이 생수의 샘인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들이 자기들을 위해 터진 물 저장고를 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하시야 왕도 두 가지 악을 행하였는데, 첫 번째는 그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헛된 우상인 바알세붑을 신뢰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삶 속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우리가 다른 그 누구보다 하나님을 찾기 원하고, 하나님께 질문하기를 원합니다. 이 세상의 어떤 전문가들, 훌륭한 사람들에게 답을 찾고 구하기 전에, 살아계신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기를 원합니다.
여기서 너무나 신기하고 감사한 것은 아하시야가 비록 헛된 우상들에게 잘못 질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친히 먼저 엘리야를 통해 아하시야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질문한 것이 아닌데도, 하나님께서 대답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축복의 대답이 아니었고, 화평의 대답이 아니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친히 엘리야를 통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경고의 말씀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아하시야를 바로 죽게 하시지 않고, 그에게 반드시 죽으리라는 경고의 말씀을 주셨을까요? 다시 살펴보면 그것은 다름 아닌 소망의 말씀이었으며, 또 한 번의 기회였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언자 요나를 통하여 니느웨가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였을 때,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이었던 니느웨 사람들에게 그러하셨다면, 하물며 이스라엘의 왕에게는 얼마나 더 그러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맹렬한 심판의 말씀을 주시는 이유는, 그 말씀을 듣고 경고를 받아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함께 찾지는 않겠지만, 제가 에스겔서 18장 32절 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죽는 자의 죽는 것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그런즉 너희는 돌이켜서 살지니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이라도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며, 돌이켜서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하시야에게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신 그 말씀의 참 의미는 정말 죽으라는 것이 아니라, 돌이켜서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헛되고 어리석은 질문을 한 아하시야에게 주신 놀라운 은혜의 답이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절망할 때가 있는데, 우리가 아직 숨을 쉬고 살아있다면, 여전히 우리에게 기회를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오늘 돌이키고, 오늘 순종하면서,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진실하게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 아하시야의 고집
이제 우리 함께 열왕기하 1장의 말씀으로 돌아와서, 열왕기하 1장 5-8절까지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5 사자들이 그에게 돌아오매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지금 돌아왔느냐? 하니
6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한 사람이 올라와서 우리를 만나 우리에게 말하기를, 가서 너희를 보낸 왕에게 되돌아가 그에게 이르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네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고 사람을 보내느냐? 그러므로 네가 올라간 그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 것이요,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라, 하더이다.
7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를 만나려고 올라와 이 말을 너희에게 고한 그 사람은 어떻게 생긴 사람이더냐? 하니
8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이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하매 그가 이르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 하니라.
바알세붑에게 물으러갔던 사자들이 예상보다 너무 빨리 돌아오자, 아하시야가 왜 지금 오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엘리야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아하시야에게 전달해 주었습니다. 아하시야는 그의 겉모습에 대하여 묻고는 그가 엘리야인 것을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이하시야는 이때에라도 하나님 앞에 길을 돌이켰어야 합니다. 비록 처음에는 잘못 질문했더라도, 그 다음에 힌트가 주어진 뒤에라도 올바르게 질문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왔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아버지 아합이 미가야 대언자를 감옥에 가두었던 것처럼, 엘리야를 붙잡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엘리야 한 사람을 잡아오라고 무려 오십 명의 군사들을 보내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함께 열왕기하 1장 9,10절을 보시겠습니다.
9 그때에 왕이 오십인 대장과 그의 부하 오십 명을 엘리야에게로 보내매 그가 엘리야에게로 올라가더라. 보라, 엘리야가 산꼭대기에 앉았으므로 그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께서,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하니
10 엘리야가 오십인 대장에게 응답하여 이르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너와 네 부하 오십 명을 사를지로다, 하매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와 그의 부하 오십 명을 살랐더라.
여기서 우리는 엘리야의 별명이 어째서 “불의 대언자”가 되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갈멜산에서 바알의 대언자들과 온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하나님께 헌물을 드리고, 하늘에서 불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 보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심지어 자신을 잡으러 온 아하시야의 부하들을 순식간에 불태워버리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엘리야의 능력이 아니었고, 오직 하나님의 권능이었습니다. 엘리야는 한 번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11절과 12절 말씀을 보면 두 번째로 온 또 다른 오십 명도 하늘에서 내려온 불로 살라버린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불에 타 죽은 사람들이 무고하고 불쌍한 희생자라고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엘리야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하시야 때문에 무죄한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인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무죄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고,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살 자격이 있어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을 받은 사람이든, 그렇지 못한 사람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라도 죽음을 맞이하게 될 때, 내가 왜 억울하게 지금 죽어야 하느냐고 따질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에 나타난 군사들의 죽음을 볼 때, 단순히 이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사람이 오늘도 숨을 쉬며, 맛있는 음식을 먹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대화하고, 즐겁게 생활할 수 있게 하신 놀랍고 신기한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도 숨을 쉬며 살아가고 있는 그 자체가 주님의 사랑이며 은혜이며 놀라운 기회인 것입니다. 우리가 숨을 쉬는 동안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찬양하기 원하고, 주님께서 주신 귀한 시간들을 우리가 가치 있게 살아가기 원합니다.
** 긍휼을 입은 자
이제 우리 함께 열왕기상 1장 13-1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3 그가 다시 셋째 오십인 대장과 그의 부하 오십 명을 보내므로 셋째 오십인 대장이 올라가서 엘리야 앞에 이르러 무릎을 꿇고 엎드려 그에게 간청하며 그에게 이르되, 오 하나님의 사람이여, 원하건대 내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 명의 생명을 당신의 눈앞에서 귀히 여기소서.
14 보소서,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지난번의 오십인 대장 두 명과 그들의 부하 오십 명씩을 태웠사오니 그런즉 이제 내 생명을 당신의 눈앞에서 귀히 여기소서, 하매
15 주의 천사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그를 두려워하지 말고 그와 함께 내려가라, 하시니라. 그가 일어나 그와 함께 내려와 왕에게 이르러
16 그에게 말하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사자들을 보내어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 하였으니 그것은 이스라엘에 말씀을 여쭐 만한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 아니냐? 그러므로 네가 올라간 그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 것이요,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니라.
우리는 여기에서 아하시야의 고집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엘리야에게 보냈던 자기의 군사들이 두 번이나 죽은 것을 알면서도, 또 세 번째로 군사들을 보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육신의 모습은 고집스럽고 이기적인 것입니다.
그래도 세 번째 오십인 대장은 하나님 앞에 긍휼을 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생명을 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를 긍휼히 여기신 주의 천사는 엘리야에게 그 오십인 대장과 함께 가라는 지시를 하셨고, 엘리야는 순종하여 아하시야 왕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했던 말씀 그대로 또 다시 전해 주었습니다. 오늘의 말씀 열왕기하 1장에서는 아하시야를 책망하는 동일한 말씀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아하시야가 돌이키기를 원하셨으며, 기회를 주고 계셨음을 강조하여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시니, 지금이라도 돌이키고, 어서 묻고 구하라고 기회를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것은 아하시야가 끝까지 주님께 구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 정리
오늘 우리는 “질문이 만드는 답”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다양한 질문을 볼 수 있습니다. 파라오는 주가 누구냐고 물었고,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라고 물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을 책잡으려고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진리를 구하지 않았던 그들은 참 진리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한번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행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렇다면 요한의 침례가 하늘에서 온 것인지, 사람들에게서 난 것인지 대답해 보라고 역으로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들은 따져보면서 만약 하늘에서 온 것이라고 하면 왜 믿지 않았느냐고 질책을 받을 것이고, 사람들에게서 온 것이라고 하면 백성들이 침례자 요한을 대언자로 여기고 있으므로 백성들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답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도 대답해주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들에게 답을 주신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주신 그 질문 자체가 답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질문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정확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답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께 나아와 질문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응답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며, 우리와 동행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바르게 질문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에게 일어난 상황과 문제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아하시야가 주목했어야 하는 것은 자신의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경제적인 사정이나, 가정의 문제나,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나, 상황적인 문제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고, 질문해야 하는 주제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순종해야 할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묻고, 그 답을 알 수 있다면, 우리는 사망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고, 원수들의 얼굴 앞에서도 풍성한 만찬을 먹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기도회로 나왔습니다. 주님께 묻고, 구할 기도의 제목들을 가지고 나아왔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가서 그 무엇보다 주님의 뜻을 묻기 원하고, 첫째로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기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