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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J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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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J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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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이다헌
2016.12.23.금 - 작은 사람들(요 6:20,21, 이다헌 학생 설교, CCA 우리들의 이야기)




2016년 12월 23일 금요일 <우리들의 이야기 설교>

작은 사람들(요 6:20,21)

이다헌

오늘 다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6장입니다. 요한복음 6장 20절과 21절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6장 20절과 21절 말씀, 다 찾으셨다면 저와 여러분이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20.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라.
21. 이에 그들이 그분을 반가이 배로 받아들였고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뭍에 이르렀도다. 

저는 오늘 “작은 사람들” 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길 원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작은 사람들” 입니다.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서론 
여러분, 여러분은 언제 가장 자신이 작다고 느껴지십니까? 저는 키 큰 사람이 옆에 지나가면 괜스레 주눅이 들고, 키 큰 사람이 옆에 서면 괜스레 땅만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저보다 키가 작은 사람이 저와 함께 있게 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괜히 뭔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우주 안에 지구가 있고, 지구 안에는 한국이 있습니다. 한국 안에 일산이 있고, 일산 안에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 구름의 눈에 우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우리는 우리보다 작은 것만 바라보며 스스로 크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그저 착각입니다.

우리는 작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작은 우리’ 보다 ‘크신 분’ 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크다고 여기는 모든 것보다 크신 분입니다. 그분께서 얼마나 크고 놀라우신 분인지는 성경에 수차례 기록되어 있는데, 저는 그 중에서 창세기 1장 1절 만큼 그분의 권능에 대해 잘 묘사하고 있는 구절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1.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우리의 머리 위에 있는 하늘, 우리가 딛고 있는 땅, 그 모든 걸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작은 우리’ 에게 먼저 다가와 주셨습니다. 십자가로써 승리하셨고, 보혈로써 죄사하셨으며, 우리로 하여금 세상과 구별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크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에도 불구하고 ‘작은 우리’에게는 이 세상으로부터 너무나도 ‘큰 바람’ 과 ‘큰 폭풍’ 이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쓰러지고, 넘어지며, 낙담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초조함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대체 왜 주님께서는 나에게 이러한 시련이 닥쳐오도록 허락하시는지, 대체 왜 주님께서는 오늘 말씀에 나오는 제자들과 같이 그저 배에서 항해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드는데 바람과 풍랑까지도 만나게 하시는지,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는 갈등하게 됩니다.

매번 이렇게 험난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과연 오늘 본문에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살펴보길 원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 각자에게 친히 말씀해 주시길 원합니다. 


** <사건 I>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은 주님께서 바다 위에서 걸으시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언제나 “오병이어” 사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비단 요한복음 뿐만이 아니라 마태복음 14장에서도 오병이어 다음에 오늘의 장면이 기록되어 있고, 마가복음 6장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오병이어” 는 단지 어느 한 소년의 작은 드림으로, 단지 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로 예수님께서 남자만 오천 명쯤 되는 무리를 모두 먹이신 사건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6장 15절에서는 그 무리가 그 “오병이어” 의 기적으로 인해 예수님에 대해 놀라고, 심지어는 자신의 왕으로까지 데려다가 삼으려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5절 말씀, 저와 여러분이 함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15. 그러므로 그들이 와서 억지로 자기를 데려다가 왕으로 삼으려는 것을 예수님께서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그렇게 할 것을 아셨고, 그렇기 때문에 산으로 먼저 미리 내려가셨습니다. 그리고 16절과 17절 말씀에 보면, 제자들 또한 다시 바다로 내려가 배에 올라타게 됩니다. 이 본문을 더욱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복음서도 함께 참고하여 봐야 합니다. 제자들은 지금 스스로 배에 탄 것이 아닙니다. 

함께 찾아보지는 않겠지만, 마태복음 14장 22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2. 즉시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을 강권하사 자기가 무리들을 보내는 동안 배를 타고 자기보다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제자들은 스스로의 의지로 바다로 내려가 배에 올라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재촉하시고, 강권하셨기 때문에 주님보다 앞서 건너편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무리들을’ 상대하시는 동안 말입니다. 대체 왜 주님께서는 ‘어떻게 본다면 귀찮게’ 이런 식으로 행하셨을까요? 왜 굳이 자신이 무리와 함께 있고, 제자들을 먼저 보내셨을까요?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예수님 곁으로 모여든 ‘무리들’ 에게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잘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뜻에 맞춰 그분에 대해 오해했습니다. 요한복음 6장 2절에서는 ‘그 무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2. 큰 무리가 그분을 따르니 이는 그분께서 병든 자들에게 행하신 기적들 즉 그분의 기적들을 그들이 보았기 때문이더라.

그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이유는 그분의 가르침이 놀라워서가 아닙니다. 단지 그분께서 행하신 기적이 놀라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단지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되고 싶었기에, “예수님" 과 함께했습니다. 즉, 하늘의 왕국이나 그분의 나라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조차 두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이익과 자신의 욕심 때문에 예수님과 동행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무리로부터 제자들을 분리시키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3절에서는 속지 말라, 악한 사귐은 선한 습성을 부패시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무리’ 안에는 세속주의가 있었습니다. 누군가 왕으로 모신다는 것은 올바르고 멋있어 보이지만, 그들은 그저 자신의 욕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에 대해 오해하고, 자신의 이익 때문에 세상과 타협하며 예수님과 함께했습니다. 아예 예수님에 대해 모르고, 그분과 함께하지 않은 세상보다 오히려 그분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며 그분의 제자인 척 하는 무리가 제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위험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이러한 세속주의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과 동화되며, 세상과 함께하는 길에서부터 돌아서야 합니다. 단지 ‘~하기 위해’, ‘~되기 위해’ 주님을 따른다면, 그보다 더욱 불행한 삶은 없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먼저 앞서가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배에 올라탄 것처럼, 우리 또한 그렇게 하길 원합니다.

세상과 친구 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된다는 진리의 말씀 앞에 우리가 순종하여 ‘세상’으로부터 분리되고, 주님께 한 걸음 더욱 나아가며, 그분과 더욱 굳건하게 연합되길 원합니다.


** <사건 II>
이제 우리 다 함께 요한복음 6장 17절과 18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17. 배에 올라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제 날이 어두웠고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오지 아니하셨더라.
18. 큰 바람이 불어 바다가 출렁이더라.

제자들은 이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배에 올라타 항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가뜩이나 날도 어둡고, 아직 예수님도 오시지 않았는데. 18절 말씀에 보면, 큰 바람이 불어 바다가 출렁이기 시작합니다. 과연 이때 이들의 마음은 어떠했을지 우리가 한번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바다 속에서 보이는 것이라곤 서로의 창백한 얼굴뿐입니다. 바람은 불고, 바다는 일렁이고, 배는 미친 듯이 요동칩니다. 아마 그들은 정말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생각에 각자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을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에게 닥쳐온 두 번째 위험은 ‘큰 풍랑’ 이었습니다. 그들이 절대적으로 의지하던 대상이 사라진 곳에서, 더 이상 밝은 낮이 아닌 어둠 속에서, 그렇게 크지도 않은 배에 올라탄 제자들에게 ‘큰 바람’ 과 ‘일렁이는 바다’ 는 그 어느 무엇보다 가장 큰 위험이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주님께서 먼저 가라고 하셨기에 배에 올라탔습니다. 무언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그저 주님께 순종한 것뿐인데 그들은 바다가 일렁이며, 배가 흔들리는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무리들로부터 벗어났더니 또 다른 고난이 그들 눈앞에 펼쳐진 것입니다.

이들의 모습은 우리와 비슷합니다. 주님께서 이쪽으로 가라 하셔서 이쪽으로 갔더니 무언가 거대한 것이 다가옵니다. 그분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새로운 시련이 찾아옵니다. 또한 때로는 ‘주님’을 믿고 ‘구원’ 받아서 완전히 의롭다 ‘칭함’을 받았는데 왜 나는 여전히 계속해서 죄를 짓고 있을까, 왜 나는 여전히 세상에서 고통 받고 있을까, 이러한 답답함과 불안감이 우리의 마음속으로 스며들기도 합니다. 

그럼 이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는지 우리 함께 19절과 20절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9. 이에 그들이 노를 저어 이십오 내지 스타디온쯤 가다가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20.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니라.
비록 두려워했지만 제자들은 열심히 노를 저었습니다. 19절에는 그들이 이십오 내지 스타디온쯤 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약 4km에서 5km 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아직 건너편 까지는 삼분의 일정도 더 가야 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자신이 얼마만큼 왔는지, 얼마나 더 가야 되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주위를 둘러볼 여유 따위는 없었습니다. 그저 이 모든 괴로운 상황에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때,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20절입니다.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는 이 부분에서 조금 의아합니다. 보통 예수님께서는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실 때 “나는 ~이다” 라고 소개하시곤 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그런데 20절에서는 그 아무런 수식어 없이 그저 “나다.” 라고만 말씀하고 계십니다.

원어인 영어를 함께 보시면 아마 이 내용이 조금 더 쉽게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나니”는 영어로 “It is I”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It is I" 라고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세미콜론, 점 두 개가 위 아래로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be not afraid", “두려워하지 말라.” 라는 문장이 나와 있습니다.

어떤 문장 뒤에 세미콜론이 붙여진다는 것은 그 붙여진 문장 뒤에 있는 문장이 그 붙여진 문장을 꾸며준다는 의미입니다. 즉, “It is I" 라는 문장 뒤에 세미콜린이 붙여짐으로써 ”be not afraid" 가 그 "I"를 보충으로 설명해준다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라는 문장이 “나” 라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해준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나” 는 어떤 분입니까? 바로 평안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아무리 거센 폭풍이 밀려온다 할지라도 주님은 여전히 평안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나” 라는 이름과 함께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7.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남기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세상이 주는 것과 달리 내가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사람은 작은 존재입니다. 완전하지 못한 존재입니다. 사람은 쉽게 한계에 다다르고, 쉽게 절망하고, 쉽게 낙담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크십니다. 완전하시고, 한계가 없으십니다. 우리의 낡은 배가 거센 파도와 풍랑으로 인해 흔들리게 되더라도 주님은 언제나 말씀하십니다.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목적지까지 가는 것은 너희가 아니라 내가 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날이 아무리 어두워도 태양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단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옆에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우리 앞에 다가오는 저 거대한 파도 때문에, 저 거대한 풍랑 때문에 인지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21절 말씀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21. 이에 그들이 그분을 반가이 배로 받아들였고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뭍에 이르렀더라.

아멘. 제자들의 눈앞에 파도와 바람은 여전히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들에게 그것은 결정적인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결정적인 것은 바로 그 배에 다시 예수님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배는 곧 뭍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게 될 때, 주님과 함께하게 될 때, 우리의 길은 더 이상 어둡지 않습니다. 주님의 평안 속에 안식하게 될 때 배는 곧 뭍에 이르게 됩니다. 너무나 멀게 보였던 그곳이 이제는 더 이상 ‘목적지’ 가 아닌 이미 도착한 그곳이 되고, 나의 마음속에 가득했던 근심이 ‘평안’ 으로 바뀌어 가득 차게 됩니다.

큰 바람과 거센 파도로 가득 한 이 험난한 인생 속에서 주님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 평안 하라. 안식하라. 이 따스한 음성에 우리가 귀 기울이길 원합니다. 주님을 반가이 우리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그분의 평안 속에 안식하길 원합니다. 


** 결론 <작은 사람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작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 행사에 함께 해주신 모든 학부모님들과 그동안 열심히 준비하느라 바빴던 학생들, 우리 모두는 “작은 사람들”입니다. 같은 “주님” 안에 있고, 같은 “경주” 안에서 달리고 있으며, 같은 “목적지”만 바라보며 항해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산도 많이 넘고, 강도 많이 건너야 합니다. 눈으로 보이는 목적지가 아니라, 믿음으로 보이는 목적지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너무나 좁고 험해서 우리는 도중에 지치기도 하고, 오늘 살펴본 제자들과 같이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마다 우리는 “작은 날” 바라보면 안 됩니다. “큰 풍랑”을 바라보면 안 됩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분은 오직 단 한분,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제자들이 일렁이는 파도와 흔들리는 배에만 집중했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온 마음은 불안함으로 가득 차고, 그 불안함은 그들의 눈과 귀를 가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반가이 배로 모셨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불안함은 평안함으로 변했고, 그들의 배는 어느새 목적지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큰 풍랑’ 앞에 마주한 ‘작은 제자들’ 에게 찾아오시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그분은 곧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 소망 하나만 붙들고서, 조금만 가면 된다는 마음으로, 언제나 넘어져 있는 우리에게 손 내밀어 주시는 “주님”만 바라보고 우리가 다시 일어선다면, 우리에게 “인생” 은 더 이상 험난하게만 느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알고 있는 진리 중의 하나는 “끊임없이” 걷다 보면 “틀림없이” 도착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날까지 주님과 동행하며, 그분 안에서 안식하고,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서서 달려가길 원합니다. 

우리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10장 28절과 29절 말씀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시작. 

28.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노니 그들이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아무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하리라.
29. 그들을 내게 주신 내 아버지는 모든 것보다 크시매 아무도 내 아버지 손에서 능히 그들을 빼앗지 못하리라.

아멘. 기도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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