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2년 8월 1일 수요기도회설교
안식을 얻는 길 - 십자가(에 4:10-16)
“에스더가 다시 하닥에게 말하고 그에게 명령을 내려 모르드개에게 전하기를, 왕의 모든 신하들과 왕의 지방들의 백성들이 알거니와 남녀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 왕에게 나아가면 왕의 법은 그를 죽이는 것 하나뿐이며 다만 왕이 그 사람에게 황금 홀(笏)을 내밀어야 그가 살리이다. 그러나 이제 내가 부름을 받지 못해 왕에게 나아가지 못한 지 이미 삼십 일이나 되었나이다, 하라.
그들이 에스더의 말을 모르드개에게 고하매 그때에 모르드개가 명령하여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네가 왕의 집에서 모든 유대인들보다 더 잘 피하리라고 스스로 생각하지 말라. 이때에 네가 전적으로 잠잠하면 유대인들은 다른 곳으로부터 해방과 구출을 받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이와 같은 때를 위해 왕국에 들어갔는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라.
이에 에스더가 그들에게 명하여 돌아가서 모르드개에게 이같이 답하게 하되, 가서 수산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함께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사흘 동안 밤낮으로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내 시녀들과 함께 그렇게 금식하리이다. 그리고 나서 내가 법대로 하지 아니하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내가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매”(에스더기 4:10-16).
지금 우리가 읽었던 에스더기 4장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유대 민족이 페르시아의 포로가 되어 페르시아 제국 안에 살고 있었는데, 그 민족이 큰 위기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하만이라는 사람이 유대 민족을 멸절시키고자 하는 음모를 꾸미고, 페르시아 왕인 아하수에로 왕의 허락을 받아 어떤 정한 날에 페르시아 제국 내에 있는 유대 민족을 멸절시키는 대학살을 행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에 의해서 허락되어진 그것은 페르시아 법에 의해서 취소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유대 민족은 꼼짝없이 죽게 되었습니다.
에스더기 4장 1절의 말씀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르드개가 이루어진 모든 일을 깨닫고는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으며 재를 뒤집어 쓰고 도시 한가운데로 나아가 큰 소리로 비통하게 부르짖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당시에 모르드개라는 유대인이 있었는데, 자신과 자신의 민족에게 일어나게 될 그 큰 일에 관하여 듣게 되었을 때, 비통하게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모르드개의 삼촌의 딸이었고 자신의 양딸로 삼았던 에스더에게 찾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스더는 당시 페르시아의 왕비였습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유대 민족을 살릴 수 있는 소망이 있음을 보고 그녀에게 찾아가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스더기 4장 8절을 보시겠습니다.
“또 수산에서 유대인들을 멸하기 위해 전달된 칙령 문서의 사본을 하닥에게 주고 그것을 에스더에게 보여 주어 그녀에게 그것을 밝히 알리게 하며 또 그녀에게 부탁하여 그녀가 왕에게 들어가 그 앞에서 자기 백성을 위해 그에게 간구하고 요청하게 하니”
모르드개는 에스더가 왕비이니 아하수에로 왕에게 찾아가서 유대민족을 위해서 간구하고 요청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에스더는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10절과 11절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에스더가 다시 하닥에게 말하고 그에게 명령을 내려 모르드개에게 전하기를, 왕의 모든 신하들과 왕의 지방들의 백성들이 알거니와 남녀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 왕에게 나아가면 왕의 법은 그를 죽이는 것 하나뿐이며 다만 왕이 그 사람에게 황금 홀을 내밀어야 그가 살리이다.
그러나 이제 내가 부름을 받지 못해 왕에게 나아가지 못한 지 이미 삼십 일이나 되었나이다, 하라.”
지금 에스더가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하수에로 왕이 부르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에게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부름 받지 않고 왕에게 나아가면 그를 죽이는 것 한가지라는 것입니다. 다만 왕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황금 홀을 내밀어야만 살 수 있는데, 자신은 왕으로부터 부름 받지 못한지 30일이나 되었으므로 왕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상태로 왕에게 나아가면 죽을 것이 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에스더의 심정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민족인 유대민족이 멸망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모르드개와 마찬가지로 대단히 마음이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모르드개의 말처럼 자신이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가서 청하려 하니 마음이 어떤 것입니까? 두려운 것입니다. 상황은 자신이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은데, 막상 그렇게 하려 하니 마음이 두려운 것입니다. 자신이 죽게 될까 두려운 것입니다.
오늘 저는 이 에스더의 심정과 같이 우리의 삶 속에서 두려움을 느낄 때가 많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일들이 잘못될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염려하던 그 일들이 일어날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어떤 일에 손실을 보거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잃어버릴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은 안식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안식을 찾을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3절과 14절에서 모르드개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모르드개가 명령하여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네가 왕의 집에서 모든 유대인들보다 더 잘 피하리라고 스스로 생각하지 말라.
이때에 네가 전적으로 잠잠하면 유대인들은 다른 곳으로부터 해방과 구출을 받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이와 같은 때를 위해 왕국에 들어갔는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라.”
지금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말처럼 다른 유대인들의 멸망을 자신이 잘 피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즉, 자신의 신분이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이니 자신이 잠잠하면 자신을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의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를 안전하게 지켜줄 수 없는 것입니다. 모르드개의 말처럼 “...이때에 네가 전적으로 잠잠하면 유대인들은 다른 곳으로부터 해방과 구출을 받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고 말한 것처럼, 그녀의 생각이 그녀를 지켜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을 들었을 때, 그녀는 어떻게 했습니까? 16절과 같이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서 수산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함께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사흘 동안 밤낮으로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내 시녀들과 함께 그렇게 금식하리이다. 그리고 나서 내가 법대로 하지 아니하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내가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매”
우리가 지금 이 말을 하고 있는 에스더에게 느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안식입니다. 그리고 담대함입니다.
그녀는 좀 전까지 자신이 죽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그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랬을 때, 그녀는 안식을 얻었고, 담대함을 얻을 수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안식을 찾을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에스더처럼 붙잡고 있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잃고 싶지 않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잘 되게 하기 위해서 내가 해보려고 하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놓칠까봐, 잃게 될까봐, 잘 안될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는 안식이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안식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저와 여러분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누가 우리 안에 사시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우리 안에 사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면 우리는 그분 안에서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신뢰할 때,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해보려고 하는 이상 우리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붙잡고 있는 이상 우리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에스더는 죽음을 두려워했습니다. 왕비의 신분을 잃어버리게 될까봐 두려워했습니다. 그동안 그녀가 쌓아왔던 그 모든 것들이 다 무너지게 될까봐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그때 왕에게 나아가지 아니함으로써 자신을 지키고 싶었고, 자신의 왕비의 신분과 그동안 쌓아올렸던 그 모든 것들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안전하지도 않고, 그녀 자신에게 안식을 가져다 줄 수 없었습니다. 그녀에게 안식을 찾게 해주고, 담대함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뜻대로 하기 위해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전히 주님께 자신을 의탁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생각들은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줄 수 없을 뿐 아니라 그 생각들이 우리의 마음에 안식을 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에게 안식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 예수님께 우리 자신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안식을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7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죽은 자는 죄로부터 해방되느니라.”
십자가는 우리를 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육신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저와 여러분이 안식을 얻을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를 원합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자신이 죽었음을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그럴 때, 주 예수님 안에서 저와 여러분이 안식을 얻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십자가와 연합하게 될 때, 우리가 주님 안에서 안식을 얻을 뿐 아니라 주님께서 모든 것을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스더기 5장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제 셋째 날에 에스더가 왕비의 예복을 입고 왕의 집 안뜰 곧 왕의 집 맞은편에 서매 왕이 왕의 집에서 그 집의 문을 마주보며 자신의 왕좌에 앉아 있다가
왕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보았는데 이때에 그녀가 왕의 눈앞에서 은총을 입으니라. 왕이 손에 잡고 있던 황금 홀을 에스더에게 내미니 이에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홀의 윗부분에 손을 대니라. 그때에 왕이 그녀에게 이르되, 왕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냐? 또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냐? 왕국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 하매”
에스더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자신을 의탁하며, 나아갔을 때, 주님께서 그녀를 위하여 모든 것을 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에스더가 왕의 부름이 없이 왕의 뜰에 나아갔을 때, 왕이 그녀에게 황금홀을 내민 것입니다.
2절에서 “왕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보았는데 이때에 그녀가 왕의 눈앞에서 은총을 입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왕비 에스더를 보았을 때, 그녀가 그의 눈앞에서 은총을 입었습니다.
페르시아 왕은 암살의 위험에 언제나 놓여 있기 때문에 자신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누군가가 왕의 안뜰에 서 있는 것은 왕에게 대단히 위협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왕비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또한, 30일간 그녀를 부르지 않았다는 것은 왕이 그녀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는 것인데, 자신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왕비가 왕의 안뜰로 찾아왔다는 것은 자칫 큰 미움을 살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 왕이 에스더에게 호의를 갖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한 것입니까? 주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아하수에로 왕의 마음에 에스더에 대한 좋은 마음, 긍휼한 마음을 주셔서 황금홀을 내밀게 하셨던 것입니다.
에스더는 왕이 황금 홀을 내밀지 않을까 두려워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주님의 뜻대로 하기 위하여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을 때, 주님께서 그녀를 위해서 그 일을 하셨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었습니다. 에스더의 간청이 왕에게 아무 걸림 없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3절을 보시면,
“그때에 왕이 그녀에게 이르되, 왕비 에스더여,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냐? 또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냐? 왕국의 절반이라도 그대에게 주겠노라..”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그가 왕비를 보자마자 왕국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하는 것은 왕이 왕비를 참으로 좋아하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왕은 왕비인 에스더의 간청을 기쁘게 수락하고, 유대 민족을 멸망시키려 했던 하만을 멸하고, 유대인들을 구하도록 허락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을 누가 하신 것입니까? 주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언제 주님이 일하셨는가 입니다. 바로 에스더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을 때입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이 십자가와 연합하여 우리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일 때, 주님께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고후 10장 3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비록 우리가 육신 안에서 걸으나 육신을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전쟁 무기는 육신에 속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통해 강력하여 요새들도 무너뜨리느니라.
우리는 상상하는 것과 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대적하여 스스로를 높이는 모든 높은 것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하며 너희의 순종이 이루어질 때에 모든 불순종을 응징하려고 준비되어 있노라.“
5절에서 “우리는 상상하는 것과 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대적하여 스스로를 높이는 모든 높은 것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십자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상하는 것과 우리의 생각들은 우리를 지켜줄 수도 없고, 아무런 일들도 이룰 수 없으며, 우리의 마음에 안식을 가져다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상과 생각들을 하는 우리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받아들이고, 주 예수님을 의지할 때, 어떻게 된다고 말씀하십니까?
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순종이 이루어질 때에 모든 불순종을 응징하려고 준비되어 있노라.”
누가 하시는 것입니까?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와 연합할 때, 주님께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는 우리가 주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안에 살아계신 주님께서 일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순간 우리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기를 원합니다. 매순간 십자가와 연합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안식을 얻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살아계셔서 일하시는 것을 보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끝으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갈보리침례교회 http://calvary-baptist-church.net/1489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