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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Ez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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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Ez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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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8.일 갈보리침례교회 주일오후예배말씀

감동이 가득한 예배를 원합니다(스 3:13)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라 3장 말씀입니다. 에스라 3장 13절 말씀입니다.
이에 기뻐서 내는 소리와 백성의 우는 소리를 백성이 구분하지 못하였더라. 백성이 크게 외치매 그 소리가 멀리서도 들렸더라.
저는 오늘 “감동이 가득한 예배를 원합니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오늘 말씀의 제목은 “감동이 가득한 예배를 원합니다”입니다. 오늘의 말씀 에스라 3장 13절은 이스라엘 백성의 큰 외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큰 함성이었고, 멀리서도 들리는 큰 소리였습니다. 그것이 기뻐서 내는 소리인지, 아니면 우는 소리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섞여있었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예배 가운데 울려 퍼진 소리였다는 것입니다. 이 예배는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성전이 무너진 이후에, 70년 만에 다시 드려진 이스라엘의 경배였습니다. 어떤 이는 성전의 기초가 다시 놓인 것이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고, 또 어떤 이는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 함성을 질렀습니다.

스룹바벨과 함께한 이스라엘 백성의 경배 속에는 이와 같은 감격과 감동이 가득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에스라 3장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예배의 감격이 어떻게 회복되었는가를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앞부분에서는 먼저 말씀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설명을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뒷부분에서는 우리가 이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영적 교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예배와 경배에도 눈물이 있고, 기쁨이 있고, 큰 외침도 있는 그런 “감동이 가득한 예배”가 되기를 원합니다.


** 이스라엘의 명절들
이제 우리 함께 에스라 3장 1,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 일곱째 달이 이르렀을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도시들에 거하다가 백성이 한 사람같이 예루살렘에 함께 모이니
2 그때에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번제 헌물을 제단 위에 드리려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제단을 쌓았더라.

고레스 왕의 칙령에 따라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향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백성들이 처음 돌아왔을 때에는 우선 예루살렘과 주변 도시들에 자리를 잡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집도 마련하고 농사를 지을 밭도 개간했어야 할 것입니다. 잠시 바로 위 구절인 에스라 2장 70절 말씀의 끝부분을 보시면, 온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도시들에 거하였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읽은 에스라 3장 1절 말씀에서는, 일곱째 달이 이르렀을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각자의 처소에 거하다가 한 사람같이 예루살렘에 함께 모이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일곱째 달이라는 것은 본래 이스라엘의 달력에 따라 명절을 지키는 기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흩어져 있다가, 일곱째 달이 이르렀을 때에, 한 사람같이 모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잠시 이스라엘의 명절에 대해서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신명기 16장 1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네 모든 남자는 한 해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장막절에 주 네 하나님께서 택하실 곳에서 그분 앞에 보이되 주 앞에 빈손으로 보이지 말고
이스라엘에는 총 7개의 명절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는 그 모든 명절 중에서 특별히 세 번의 명절인 무교절과 칠칠절과 장막절에,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이 성막으로, 즉 성전으로 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7개의 명절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은 결과적으로 7개의 모든 명절 기간 동안 다 함께 예루살렘에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여로보암 왕은 이렇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1년에 세 번씩 계속 모이게 되면, 북왕국 사마리아가 무너지고, 결국 다시 남왕국 유다로 합쳐질 것이라 생각해서,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세우고,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에 가지 못하게 막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일곱 명절은, 첫째 달 십사일 유월절로부터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은 유월절에 어린양을 잡고, 그 피를 문에 뿌리고, 그 고기를 먹으면서, 이집트에서 자기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찬양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부터 일주일간 누룩 없는 빵을 먹는 무교절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 명절은 유월절이 끝난 후에 있는 안식일의 다음날인데, 바로 초실절입니다. 그래서 초실절은 무교절 기간에 겹쳐지고 포함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3개의 명절, 즉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이 한 세트로 붙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님과 부활의 초실, 즉 첫 열매이신 예수님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 명절은 초실절 이후에 7번의 안식일을 지낸 다음날에 오는 칠칠절입니다. 7번의 안식일이 지나므로, 칠칠이 49, 그리고 그 다음날이 50번째 날이라고 해서, 칠칠절, 혹은 오순절이라고 부르는 기간입니다. 이 명절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뒤에,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시는 일을 미리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 명절은 오늘 에스라 말씀에서 본 것처럼 일곱째 달에 시작됩니다. 우리 잠시 레위기 23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레위기 23장 2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일곱째 달 곧 그 달 첫째 날을 안식일로 삼을지니 이 날은 나팔들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거룩한 집회 날이니라.
일곱째 달 첫째 날에 있는 명절은 바로 나팔절입니다. 나팔을 불 때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집회로 모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 즉 재림의 날에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는 것을 예표로 보여주는 명절입니다.

그 다음으로 레위기 23장 27절을 보시겠습니다.
또한 이 일곱째 달의 십일은 속죄일이니 그것은 너희에게 거룩한 집회 날이 되리라. 너희는 너희 혼을 괴롭게 하며 불로 예비하는 헌물을 주께 드리고
그 다음으로 일곱째 달 십일은 속죄일입니다. 이 날은 대제사장이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는 날입니다. 이 속죄일처럼, 마지막 나팔 소리와 함께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민족적으로 회개하며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고,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회복이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레위기 23장 3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일곱째 달의 십오일은 이레 동안 주를 위한 장막절이 되리라.
이제 일곱째 달의 십오일은 장막절입니다. 이 기간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함께 모여 장막을 치고 함께 지내면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입니다. 이렇게 나팔절, 속죄일, 장막절은 일곱째 달에 붙어 있는 한 세트의 명절입니다.
이 명절들은 마지막 시대에 최후의 나팔과,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속죄 이후에,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거하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영원한 왕국의 모습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에스라 말씀으로 돌아오셔서 에스라 3장 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또 기록된 대로 장막절도 지키고 날마다 요구되는 의무로서 관습에 따라 수효대로 매일 드리는 번제 헌물을 드리고
이렇게 일곱째 달에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세월 만에 장막절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장막절만 지킨 것이 아니라, 6절에 기록된 것처럼, 일곱째 달 초하루부터 모여서, 장막절과 묶여있는 한 세트의 명절인 나팔절, 속죄일, 그리고 장막절 모두를 지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동안 여로보암 왕 이후로 제대로 지켜지지 못했던 이스라엘의 명절들이 여기에서 회복되었던 것입니다.


** 스룹바벨
이제 2절 말씀을 다시 보시면,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의 형제 제사장들, 그리고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일어났다는 말씀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이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제단을 쌓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는 이 때의 대제사장이고, 학개와 스가랴 말씀에서는 요세덱의 아들 여호수아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잠시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있는 이 스룹바벨은 과연 누구일까요? 먼저 2절 말씀에 있는 스룹바벨의 아버지인 스알디엘의 이름을 영어로 한 번 확인해 보시겠습니다. 2절 영어 부분의 셋째 줄에 있습니다. “Shealtiel”이라는 이름을 찾으셨습니까? 네, 이 이름이 바로 “쉬엘티엘” 즉 스알디엘입니다.

이제 이것을 기억하시면서, 우리 함께 마태복음 1장 1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간 뒤에 여고니야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여기에서 우리는 아브라함과 다윗 왕과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볼 수가 있습니다. 참고로 이 계보에서는 모든 아들들의 이름을 다 기록한 것이 아니라, 아들의 이름을 건너뛰고 손자로 넘어간 경우들도 있는데, 이것은 유대인들의 방식에서는 이상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부분입니다.

여기 12절에 등장하고 있는 이름이 바로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입니다. 에스라 시대에 스룹바벨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 수가 있었던 이유는 그가 바로 다윗 왕의 자손이며, 또한 당시 유다의 왕이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스룹바벨의 정체가 다 밝혀진 것은 아닙니다.

먼저 스알디엘의 이름을 영어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12절의 영어 부분에서 둘째 줄 세 번째 단어입니다. “Salathiel”입니다. 그대로 읽어보자면, “샐러티얼” 즉 “살라디엘”입니다. 한글로는 에스라서와 마태복음이 모두 “스알디엘”로 일치하지만, 영어 철자로는 살짝 다릅니다. 물론 같은 사람이지만, 이름을 부르는 방식이 살짝 다른 것입니다. 에스라에서는 쉬엘티엘, 스알디엘이어고, 마태복음에서는 샐러티얼, 즉 살라디엘입니다. NIV를 비롯한 다른 영어성경들에서는 이 이름을 에스라서와 동일한 철자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킹제임스성경은 이렇게 에스라서와는 다르게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이름, “살라디엘”을 성경 다른 곳에서 한 번 더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함께 역대기상 3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역대기상 3장 17-19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7 여고니야의 아들들은 앗실과 그의 아들 살라디엘과
18 또한 말기람과 브다야와 세낫살과 여가미야와 호사마와 느다비야요,
19 브다야의 아들들은 스룹바벨과 시므이요, 스룹바벨의 아들들은 므술람과 하나냐와 그들의 누이 슬로밋과

여기에서 우리는 다윗의 후손 중에서 바빌론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여고니야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17절 말씀처럼 그의 아들은 앗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앗실의 아들은 “살라디엘”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마태복음에서는 앗실을 생략하고 바로 살라디엘로 넘어갔습니다.
여기에 나온 살라디엘을 영어로 보시면 마태복음에 등장한 바로 그 이름과 일치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18절에서 살라디엘, 즉 스알디엘의 다른 형제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로 말기람, 브다야, 세낫살, 여가미야, 호사마, 느다비야입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19절에서 브다야의 아들들 중에 스룹바벨이라는 이름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정리해 보면, 먼저 스가랴서에서는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이라고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느헤미야에서도, 학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살라디엘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펼친 역대기상 3장에서는 스룹바벨이 살라디엘의 동생인 브다야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룹바벨은 과연 누구의 아들일까요?

이 모든 내용을 조합해 보면, 우리는 유대인들의 율법에 나타난 역연혼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 잠시 함께 신명기 25장 5,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5 형제들이 함께 거하는데 그들 중 한 명이 죽고 아이가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밖에서 남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녀의 남편의 형제가 그녀에게로 들어가 그녀를 아내로 취해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녀에게 행할 것이며
6 이로써 그녀가 낳는 맏아들이 죽은 그의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결혼에 대한 법입니다. 형제들 가운데 누군가가 자식이 없이 죽었을 때, 그 아내는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갈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형제들 중에서, 가장 가까운 친족들 중에서 남편을 찾아 재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로 낳는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방식의 결혼을, 룻기에서 잘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스룹바벨은 본래 브다야의 아들이지만, 그가 불리는 이름은 자식이 없이 죽었던 살라디엘, 즉 스알디엘의 이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역사 속에서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이라고 불리게 되는 것입니다. 스룹바벨은 아버지인 삼촌을 가진 자였으며, 동시에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가진 자였습니다. 이러한 스룹바벨이 다윗의 후손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 형제들의 연합
이제 우리 함께 다시 에스라 3장으로 돌아오시겠습니다. 여기까지 우리는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몇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부터 “감동이 가득한 예배를 원합니다”라는 오늘의 주제에 맞게 영적 교훈들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누가 예배를 드렸는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1절에 나타난 것처럼, 한 사람이 같이 함께 모인 하나님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리고 2절에 나타난 것처럼 형제들이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혼자서도 찬송할 수 있고, 혼자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이고, 한 마음으로 모여서 드리는 예배를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거기에, 그들의 한 가운데 있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예배하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해하고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형제들과 함께, 교회로서 찬송을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감동이 가득한 예배를 원한다면, 형제자매들과 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한 마음으로 모이고자 한다면, 나의 이름이 아니라, 다른 누구의 이름이 아니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여야 합니다. 우리는 영과 진리로 경배해야 하는데, 우리 안에 영으로 거하시는 주 예수님, 또한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는 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모이고 경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주인공이 되시고, 예수님만이 우리의 방법이 되시며, 예수님만이 우리의 중심이 되시고, 모든 것이 되실 때, 비로소 우리는 형제자매들과 완전히 한 마음으로 함께할 수 있고, 감동이 가득한 예배로 나아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가 용납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못마땅한 형제자매들이 있다면, 받아들이고 용서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신 것처럼, 그렇게 우리가 형제자매들을 용서하고 받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한 마음으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일 때, 우리 안에 감동이 가득한 예배가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 말씀대로
그 다음으로 우리는 2절 말씀에서 모든 형제들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제단을 쌓았다는 말씀을 볼 수가 있습니다. 또한 4절 말씀에서 기록된 대로 장막절을 지켰다는 말씀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말씀처럼, 우리가 감동이 가득한 예배로 나아가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대로 예배하며, 말씀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중심이 되고, 충만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감동이 가득한 예배로 주님 앞에 나아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 경배가 먼저
또한 우리 함께 에스라 3장 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들이 일곱째 달 초하루부터 주께 번제 헌물을 드리기 시작하였으나 주의 성전의 기초는 여전히 놓지 못하였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곱째 달 초하루부터 모여서, 즉 나팔절부터 지키기 시작하였고, 장막절에 이르기까지, 즉 십오일이 될 때까지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번제헌물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주의 성전의 기초는 여전히 놓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의 기초조차 놓지 못하였지만, 이미 하나님께 번제 헌물을 드리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아직 외적인 부분이 갖추어지지 않았어도, 먼저 하나님께서 번제 헌물을 드리기 시작한 점을 주목해 보기 원합니다. 우리는 때로 어떠한 상황이나 환경이 잘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을 섬길 수가 없고, 따를 수가 없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나 자신의 모습이 주님 앞에 잘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경배할 수가 없고, 주님 앞에 온전히 나올 수가 없다고 여길 때가 있습니다. 아직 준비가 안 되어서, 주님께 헌물을 드릴 수가 없고, 나의 시간과 일생을 드릴 수가 없다고 여길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 폐허와 같은 상태에서 한 마음으로 모였고,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았으며, 헌물을 드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감동이 가득한 예배의 시작이었습니다.
“아니 무슨 성전에 기초도 안 놓았는데, 번제 헌물부터 태우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당시에 있었을지 모릅니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도 “아니 노래도 잘 못하는데 찬양의 희생물을 드릴 수가 있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니 말도 잘 못하는데, 무슨 간증으로 감사의 희생물을 드리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니 별로 실력도 없는데, 무슨 섬김을 하겠느냐”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을 갖추고 나서 예배한 것이 아니라, 먼저 예배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말씀처럼, 오늘 우리들의 모습과 상태 역시 보잘 것 없고, 폐허와 같고, 아무것도 갖추어지지 않았을지라도, 먼저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번제 헌물과 경배를 드리기 원합니다.


** 성전의 기초
이제 우리 함께 10절부터 마지막 13절까지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0 건축자들이 주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자기들의 옷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의 아들들 레위 사람들은 심벌즈를 들고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주를 찬양하되
11 그들이 계열대로 주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며 함께 노래하였으니 이는 그분께서 선하시며 이스라엘을 향한 그분의 긍휼이 영원하기 때문이더라. 주의 집의 기초가 놓였으므로 온 백성이 주를 찬양하며 매우 큰 소리로 소리를 내었더라.
12 그러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아버지들의 우두머리들 중의 많은 사람들 곧 첫째 집을 보았던 노인들은 자기들의 눈앞에 이 집의 기초가 놓인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울었으며 많은 사람은 기뻐서 크게 소리를 내었으니
13 이에 기뻐서 내는 소리와 백성의 우는 소리를 백성이 구분하지 못하였더라. 백성이 크게 외치매 그 소리가 멀리서도 들렸더라.

드디어 성전의 기초가 놓였습니다. 이제부터 성전을 건축하는 기나긴 여정이 시작된 것 뿐이었지만, 기초가 놓이는 그 자체가 엄청난 기쁨과 감격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자기들의 옷을 입고 나팔을 불었습니다. 아삽의 아들들 레위 사람들은 심벌즈를 들고 다윗 왕의 규례대로 주를 찬양하였습니다.

그들이 찬양과 감사를 드리며 함께 노래한 제목은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긍휼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하시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이 영원하다는 것이 찬양과 감사의 이유였습니다.
그 동안 이스라엘은 틈만 나면 우상들을 찾았고, 대언자들을 통한 경고와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렸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멸망했어도 마땅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선하셨고, 그분의 긍휼이 풍성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 땅을 밟았고, 성전의 기초를 놓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의 집의 기초가 놓으면서, 하나님께서 선하시다고, 그분의 긍휼이 영원하다고 목청이 터져라 외쳤던 것입니다.

이 자리에는 어릴 적에 솔로몬 성전을 보았던 노인들이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열 살 때 그 성전을 보았다면, 이제는 70년이 지났으니 80세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스무 살 때 그 성전을 보았다면 이제는 90세가 된 것입니다.
첫째 집을 보았던 노인들은 황금으로 뒤덮인 솔로몬 성전의 처음 영광을 알았던 사람들이고, 또 그 성전이 어떻게 폐허가 되었는지도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이제 그들은 자기들의 눈앞에 다시 성전의 기초가 놓인 것을 보고 감격에 차서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이것은 작은 흐느낌이 아니었고, 엉엉 우는 소리였습니다. 이제 겨우 기초만 놓은 것이었고, 아직 아무것도 쌓아올려진 것이 없었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선하시며 그분의 긍휼이 영원하다는 사실을 외치면서, 할 수 있는 한 가장 큰 소리로 외쳤던 것입니다.

또한 이 자리에는 비록 처음 성전의 영광은 모르지만, 바빌론 포로기를 경험하고, 다시 내 민족, 이스라엘 민족의 영광을 재건하고자 하는 열정의 청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펄쩍펄쩍 뛰면서, 기쁨의 함성을 질렀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그분의 긍휼은 영원하다. 하나님께서 우리같이 죄 많고 늘 거역하는 민족을 떠나지도 아니하시고 버리지도 아니하시며, 또 다시 새로운 기회와 회복을 주셨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이 날 예루살렘에서 회복된 이스라엘의 예배는 감동이 가득한 예배였습니다. 이 자리에는 과거에 대한 회개와 돌이킴의 눈물이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회복에 대한 감격의 눈물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긍휼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헌물도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장차 하나님의 집을 세워나갈 대한 미래의 비젼도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폐허 가운데 한 마음으로 모인 형제들이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과거의 기억을 가진 노인들도 있었고, 미래의 소망으로 넘치는 청년들도 있었습니다. 남녀노소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한 마음으로 함께 모여, 하나님의 선하심과 긍휼하심을 풍성하게 누리며 울고 웃는 감격과 감동이 가득 넘치는 예배였습니다. 이 예배의 기쁨과 함성이 멀리까지 울려 퍼졌습니다.


** 정리
저는 에스라 3장의 말씀을 다 읽고 나서, 정말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감동이 가득한 예배를 원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비록 세워진 것은 기초뿐이었고, 모든 것이 부족하고 열악한 상황이어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긍휼하심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감격이 가득하였습니다. 이처럼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교회로 한 마음으로 모일 때마다 이러한 감동의 예배를 허락해 주시기 원합니다.

이 날의 감동은 선하시고 긍휼하신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었으며, 기초가 놓인 성전 그 자체가 그들의 기쁨과 감동의 근원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예배 가운데에도 주님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성전인, 교회, 형제자매들로부터 감사과 기쁨과 감격이 가득하기를 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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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로빈시리즈 [#01] 그분의 백성이 누구냐(스 1:3) 로빈 298
1 설교 오직 내 영으로 되느니라(에스라 1:1-3) 구정민 목사님 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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