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17. 갈보리침례교회 주일오후예배 설교
한 사람이 온전케 되기까지(왕하 5:13)
이승선
오늘 함께 살펴보실 하나님의 말씀은 열왕기하 5장입니다. 열왕기하 5장 13절 말씀입니다.
그의 종들이 가까이 나아와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만일 대언자가 주인에게 명하여 어떤 큰일을 행하라 하였더라면 주인께서 그 일을 행하지 아니하셨으리이까? 그런즉 하물며 그가 주인에게 말하기를, 몸을 씻어 정결하게 되라, 함이리이까? 하매
저는 오늘 “한 사람이 온전케 되기까지”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잠시 말씀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 서론
오늘 말씀의 제목은 ”한 사람이 온전케 되기까지”입니다. 오늘의 본문 열왕기하 5장에 나타난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는 주로 구원의 복음을 설교할 때 자주 인용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나아만 장군의 나병이 치유되는 과정은, 한 사람이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는 과정으로 아주 잘 설명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를, 이미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자녀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온전케 세워지는 과정으로써 한 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처럼, “한 사람이 온전케 되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고, 어떤 과정들이 있게 되는지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친히 말씀해 주시고,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 나아만 장군의 문제
먼저 우리 함께 열왕기하 5장 1절 말씀부터 보시겠습니다.
이제 시리아 왕의 군대 대장 나아만은 자기 주인에게 크고 존귀한 자였으니 이는 주께서 그를 통해 시리아에 구출을 주셨기 때문이더라. 그는 또한 강한 용사였으나 나병 환자더라.
나아만 장군은 시리아의 군대 대장이었으며, 또한 강한 용사였습니다. 그는 왕에게 크고 존귀한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용하셔서, 그를 통해 시리아에 구출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가 나병 환자였다는 것입니다. 나병이란, 문둥병 혹은 한센 병이라는 이름을 가진 질병으로, 얼굴이나 손이나 발이 녹아내리는 무서운 병입니다. 나아만의 시대에는 아무도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었습니다. 그는 크고 존귀한 자였지만,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가지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에게는 부족함이 있고, 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일지라도, 강한 용사일지라도, 크고 존귀한 사람일지라도, 누구든지 어려운 문제를 늘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아만의 문제는 그 자신 스스로도, 그를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 그 누구도, 그 어떤 전문가도 해결해 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를 치유하시고 온전케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결국 이러한 나아만 장군을 치유하시고, 온전케 하셨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나아만 장군으로서, 어떻게 치유되고 온전케 될 수 있는가를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나아만 장군들이 과연 어떻게 하나님 앞에 온전케 세워질 것인가를 함께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 작은 소녀 한 명
이제 우리 함께 열왕기하 5장 2,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2 전에 시리아 사람들이 떼를 지어 나갔다가 이스라엘 땅에서 작은 소녀 한 명을 포로로 사로잡아 왔는데 그녀가 나아만의 아내를 섬기더라.
3 그녀가 자기 여주인에게 이르되, 내 주께서 사마리아에 계신 대언자와 함께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분의 나병을 고쳤으리이다, 하니
여기에서 우리는 작은 소녀 한 명을 볼 수가 있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평생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에서 해방을 받고, 치유를 얻고, 온전케 되는 첫 걸음은, 여기에 이름도 등장하지 않는, 작은 소녀 한 명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 소녀는 이스라엘 사람이었고, 시리아 사람들에 의해서 포로로 사로잡혀 와서 나아만의 아내를 섬기는 종이 되었습니다.
이 소녀는 성경에서도 작은 소녀 한 명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처럼, 매우 작은 자였습니다. 성경에서도 이름조차 기록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이름도 없이 살아가는 자였습니다. 그저 포로로 사로잡혀 와서 평생 노예로 살아가게 될 자였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지는 자였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크고 존귀한 자로 불린 것에 비하면, 이 소녀는 정말 작고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고 존귀한 나아만 장군의 치명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그가 온전케 되는 일에 있어서, 이 작은 소녀 한 명의 말 한마디가 너무나 크고 결정적이었습니다. 이 작은 소녀 한 명이 없었다면, 나아만은 평생을 나병 환자로 살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역사는 작은 것에서부터, 아무것도 아닌 자로부터 시작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작은 소녀가 한 일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소녀는 단지 자기 여주인에게 말 한마디를 하였을 뿐이었습니다. “내 주께서 사마리아에 계신 대언자와 함께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가 그분의 나병을 고쳤으리이다.”
작은 소녀의 말 한마디는 겉으로 볼 때,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었지만, 소녀의 속마음을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아주 큰 일 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작은 소녀는 자기를 포로로 사로잡아온 시리아 사람들을 용서했어야 합니다. 이 모든 환경을 허락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인정하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선하시며,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셨다는 사실을 믿었어야 합니다. 원수들의 대장과 같은 나아만 장군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그가 온전케 되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졌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작은 소녀의 말 한마디는 겉으로 볼 때, 아무것도 아닌 일 같지만, 소녀의 마음속에서는 너무나 놀랍고 강력한 믿음의 역사가 있었음을 주목해 보기 원합니다.
우리가 만약 나아만 장군으로서, 어제보다 오늘 하나님 앞에 더욱 온전케 되었다면, 우리에게는 우리가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할 만큼, 고마움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작았던, 작은 소녀의 말 한마디, 작은 섬김이 반드시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작은 소녀로서, 우리 옆에 있는 나아만 장군을 위해 무엇인가를 섬기고자 할 때, 겉으로 볼 때는 우리의 역할이 작고 아무것도 아닐지라도, 반드시 우리 안에서는 강력한 활동으로 역사하시는 주님의 생명의 역사를 힘입어야 함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먼저 용서해야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어야 하며,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힘입을 때에만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작은 소녀로서, 우리 옆에 있는 크고 존귀한 강한 용사인 나아만 장군을 도울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 어떤 이
이제 우리 함께 열왕기하 5장 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어떤 이가 들어가 자기 주에게 고하여 이르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소녀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 하니라.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이를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이가 나아만 장군에게 와서, 이스라엘 땅에서 온 소녀의 말을 전해주었습니다.
먼저 우리는 나아만의 아내가 작은 소녀의 말을 가볍게 듣고 무시하였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나아만의 아내는 작은 소녀의 말을 듣고도 한 귀로 흘려버렸고, 자기 남편인 나아만 장군에게 아무 말도 전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작은 섬김이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작은 소녀는 여주인에게 말했고, 여주인은 비록 그것을 무시했지만, 그것을 함께 들은 어떤 이가 있었던 것처럼, 그것이 하나님의 역사라면, 반드시 누군가를 통해서, “어떤 이”를 통해서 이어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
** 시리아 왕
이제 우리 함께 열왕기하 5장 5,6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5 시리아 왕이 이르되, 자, 갈지어다.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편지를 보내리라, 하매 그가 떠나며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6 이스라엘 왕에게 그 편지를 전하니라. 일렀으되, 보소서,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편지와 함께 당신에게 보내었으니 이제 이 편지가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 하였더라.
여기에서 우리는 시리아 왕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시리아 왕의 이름도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5장에서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 사람은 오직 세 사람인데, 바로 나아만과 엘리사와 엘리사의 종 게하시입니다. 그 외의 사람들은 모두 익명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 사람이 세워지고 온전케 되는 일에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조용하게 묵묵하게 섬기는 많은 사람들이 지나쳐 가게 됨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이름도 등장하지 않는 시리아 왕은 많은 재물을 주고, 또 이스라엘 왕에게 편지를 써주어서 나아만의 앞길을 활짝 열어주었습니다. 작은 소녀의 말 한마디로 큰 왕국의 왕까지 움직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 이스라엘 왕
이제 우리 함께 열왕기하 5장 7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그 편지를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내가 사람을 죽이며 살릴 수 있는 하나님이기에 이 사람이 내게 편지를 보내어 나병으로 앓는 사람을 고치라고 하느냐? 그런즉 청하건대 너희는 그가 나와 싸우려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하고 그 일을 알아보라, 하니라.
여기에서도 우리는 역시 이름이 등장하고 있지 않은, 이스라엘 왕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시리아 왕의 편지를 읽고는 옷을 찢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을 전쟁 선전포고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나병을 고치는 하나님도 아닌데, 어떻게 그의 나병을 고칠 수 있겠느냐며, 시리아 왕이 트집을 잡아 전쟁을 걸어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정상적이고 당연한 반응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온전케 세워지는 과정 속에 늘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 편에서는 작은 소녀가 있었고, 어떤 이가 있었고, 또 시리아 왕이 있었던 것처럼, 한 사람을 세우고 온전케 하는 일에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나아만의 아내처럼 작은 소녀의 말을 무시하는 사람도 있었고, 또 상황을 오해하고 옷을 찢었던 이스라엘 왕처럼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길에는 오해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오해와 비방을 받으셨고, 제자들에게 배신도 당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많은 오해와 비방 속에서 자신의 사역을 해명하고 변호하였으며, 사방에서 고난을 당했습니다. 이처럼 한 사람이 믿음의 길에서 온전케 세워지는 과정 속에는, 여러 가지 오해와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싸우자는 것이 아닌데, 전쟁 선포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고, 상처를 주려는 것이 아니었는데,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게 될 수도 있는 것이고, 좋은 뜻으로 섬겼는데, 비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여기에서 이스라엘 왕을 비난하거나 탓할 수도 없습니다. 그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너무나 정상적인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길에서는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습니다. 누구 때문에 문제가 생기고, 누구 때문에 실족하고, 누가 책임을 져야하고, 누가 떠나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 믿음의 길을 달리고, 각자가 자기의 순종과 불순종에 대해서 책임을 지며, 각자가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서 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누가 나에게 이렇게 하니까, 나도 그렇게 하는 것이, 당장에는 육신에 만족을 주거나, 통쾌함을 줄 수는 있어도, 우리가 성령님을 따라 걷지 않는다면, 결코 하나님 앞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육신의 만족을 얻고, 직성을 풀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또 하늘에서 영원한 보상을 얻기 위해 달리고 있음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삶 속에서 이스라엘 왕을 만날지라도, 오해나 비방이 있을지라도, 낙담하거나, 미워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꿋꿋하고 담대하게 믿음의 길을 순종하며 전진하여 걸어가기를 원합니다.
** 엘리사
이제 우리 함께 열왕기하 5장 8-1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8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 옷을 찢었다는 것을 듣고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왕의 옷을 찢었나이까? 이제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안에 대언자가 있음을 알리이다, 하니라.
9 이에 나아만이 자기의 말들과 병거를 거느리고 와서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10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어 이르되, 가서 요르단 속에서 일곱 번 씻으라. 그리하면 네 살이 다시 나와 네가 정결하게 되리라, 하니라.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이스라엘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나아만 장군을 자기에게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아만 장군은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모든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엘리사의 집 문에 섰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한 사람을 보내어 가서 요르단 속에서 일곱 번 씻으면 나병이 깨끗이 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11,1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11 그러나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보라, 나는 그가 분명히 내게로 나아와 서서 주 자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 부위를 손으로 쳐서 나병 환자를 회복시킬 줄로 생각하였도다.
12 다마스쿠스의 아바나와 바르발 강이 이스라엘의 모든 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씻으면 정결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이에 돌아서서 분노하며 떠나가니
나아만은 엘리사의 지시사항을 듣고 분노하였습니다. 그가 분노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그의 교만함 때문이었습니다. 먼저 그는 시리아에서 크고 존귀한 자인 자기가, 큰 무리를 거느리고 직접 찾아왔는데 얼굴조차 보이지 않은 대언자라는 사람에 대해서 화가 났습니다. 마땅히 머리를 조아리며 직접 나아서 제대로 된 모양새를 갖춘 의식을 행해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감히 사람을 보내어 지시사항만 전달하다니, 그 모욕감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나아만이 교만함 가운데 분노한 또 한 가지 이유는, 그의 생각과 그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씻어서 나병이 나을 것 같으면, 요르단 강보다 훨씬 더 크고 좋은 시리아의 강들도 많은데, 왜 굳이 요르단 강에서 씻어야 하느냐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케 되는 마지막 관문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의 교만한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위치에 서는 것이 아니라, 말씀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 종들
이제 우리 함께 열왕기하 5장 13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그의 종들이 가까이 나아와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만일 대언자가 주인에게 명하여 어떤 큰일을 행하라 하였더라면 주인께서 그 일을 행하지 아니하셨으리이까? 그런즉 하물며 그가 주인에게 말하기를, 몸을 씻어 정결하게 되라, 함이리이까? 하매
여기에서 우리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몇몇의 종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나아만을 온전케 하는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분노한 장군 앞에서 반대적인 조언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아만 장군을 막아섰고, 설득하였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대언자가 어떤 크고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라고 했더라도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하물며 씻어서 정결하게 되라는 것인데, 까짓것 못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들은 매우 겸손하고 지혜롭게 조언하였습니다.
오래 참음을 통해 통치자도 설득되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
바로 이 잠언 25장 15절 말씀처럼, 그들은 부드러운 혀로, 단단한 뼈와 같은 나아만 장군의 고집을 꺾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마침내 뜻을 돌이키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한 사람을 온전케 세우는 일에는 반대적인 조언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하고 세워준다는 것은, 반드시 모든 일에 찬성해 주고 지원해 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때로는 반대할 수도 있고, 때로는 막아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이 위험할 수도 있고,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만 장군에게 이 종들이 필요했던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 바로 우리에게도 이러한 반대의 조언자들이 필요합니다.
친구가 주는 상처는 믿음직하나 원수의 입맞춤은 속임수가 가득하니라.
바로 이 잠언 27장 6절의 말씀처럼, 원수는 속임수가 가득한 입맞춤으로 다가오지만, 믿음직한 친구는 오히려 쓴 소리를 하고, 냉철하게 말해서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친구는, 나를 두려워하여, 나의 눈치를 살피면서, 나의 선택에 무조건 찬성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나를 사랑하는 가운데 용기를 가지고, 나를 막아서며, 반대로 조언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나아만은 순간적으로 교만함 가운데 분노했지만, 최소한 그를 사랑하는 종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겸손의 여지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가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 일곱 번 몸을 담그니
이제 우리 함께 열왕기하 5장 14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에 그가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르단 속에 일곱 번 몸을 담그니 그의 살이 다시 나와 어린아이의 살같이 되고 그가 정결하게 되었더라.
여기에서 우리는 드디어 나아만 장군이 정결하게 되고, 그의 살이 다시 나와 어린아이의 살같이 되어 나병이 완전히 낫게 된 멋진 결말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한 결과였습니다. 믿음 안에서 온전케 되는 역사는 반드시 순종을 통하여 나타난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하기 원합니다. 또한 일곱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완전함을 의미하는 것처럼, 요르단 속에 일곱 번 몸을 담갔다는 것은 완전히 순종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신약에서는 물에 잠기는 것이 침례를 의미하는데, 침례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또한 새 생명으로, 새로운 창조물로 예수님과 함께 살아났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의 길만이 우리를 온전케 하는 역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나아만에게서 나병에 의해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한 살을 제거하시고, 어린아이의 살과 같은 민감한 살을 주셨습니다.
또 내가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고 새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 살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너희에게 살로 된 마음을 주리라.
바로 이 에스겔 36장 26절의 말씀처럼, 우리를 온전케 하시며,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에게서 돌 같은 무디고 둔한 마음을 제거하시고, 살로 된 민감한 마음, 새 마음을 주십니다. 죄에 대하여 민감한 양심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한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이러한 새로운 마음을 주시기 원합니다.
** 정리
오늘 우리는 “한 사람이 온전케 되기까지”라는 제목으로 나아만의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나아만 장군의 나병이 치유되고, 그가 깨끗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먼저 작은 소녀 한 명이 있었고, 그녀를 잡아온 시리아 사람들이 있었고, 또 그녀를 거느리고 있던 나아만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작은 소녀의 작은 말을 전해준 어떤 이가 있었고, 또 시리아 왕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있었고, 엘리사가 있었으며, 또 엘리사의 말을 전한 사자가 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분노하여 돌아가는 나아만 장군을 막아선 종들이 있었습니다. 이 중에 누구 하나라도 없었다면, 나아만 장군은 치유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한 사람이 온전케 되기까지 이름도 없는 많은 사람들의 섬김이 필요했습니다.
퍼즐 조각이 하나라도 부족하다면 완전한 그림이 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속에 많은 사람들과의 크고 작은 만남들, 여러 가지 일들을 각각의 퍼즐 조각처럼 사용하셔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온전케 하시는 그림으로 완성해 나가십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는 순종을 통해 나타날 것이고, 십자가의 삶을 통해 드러날 것이며,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또 민감하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나아만 장군으로서 걷기도 하며, 또 나아만 장군을 돕는 이름 없는 자로서 걷기도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역할이 무엇이든, 우리 안에서 강력한 활동으로 역사하시는 주님을 따라서, 우리도 또한 수고하며 달리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함께 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